항목 ID | GC089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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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福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도형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복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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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복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
출생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활동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3·1운동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복현(李福鉉)[?~?]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1919년 3월 13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월산교회 목사 김필규(金弼奎)도 이인하(李麟夏), 이택하(李澤夏)와 함께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필규 등은 1919년 3월 16일 월산교회에서 마을 지도자 이달용(李達鎔), 이승보(李承輔), 이재하(李載夏), 이택주(李宅周), 유인명(柳寅明), 홍순철(洪淳哲), 윤태익(尹泰益)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보, 이재하, 이택하 3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러자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답내리와 월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와 월산리]의 주민 200여 명이 면사무소가 있는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검거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 참여 인원이 가장 불어난 새벽 시점에는 1,000여 명에 달하는 등 급격하게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고 분위기도 격앙되었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총에 맞은 이달용, 손복산(孫福山), 신영희(申榮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은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원대현(元大鉉), 강덕여(姜德汝), 윤균(尹均), 윤정석(尹丁石), 이재혁(李載赫) 등이 중상을 입었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 일본 경찰은 만세 시위 가담자를 색출하여 김필규,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을 주동자로 체포하였는데, 이복현도 당시 함께 체포되었고, 23일 동안 구류를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화도면 월산리 3·1운동에 참여한 이복현 등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3년 설립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이복현을 비롯하여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모하고자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