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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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石夢 |
영어공식명칭 | Park Seokmong|Park Dolmong |
이칭/별칭 | 박돌몽(朴乭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형열 |
출생 시기/일시 | 1863년 - 박석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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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1일 - 박석몽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일 - 박석몽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19일 - 박석몽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 선고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5월 20일 - 진접3·1운동기념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박석몽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거주|이주지 |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활동지 |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석몽(朴石夢)[1863~?]은 1863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서 태어났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29일 밤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일대에 “거주하는 동리의 주민 일동이 모여 광릉천 강가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자.”라며 독립 만세 시위를 고취하는 내용의 격문이 살포되었다. 진접면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의 시위가 29일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 과정에서 배포된 격문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격문을 받아 본 마을 주민 이재일(李載日)[1875~1965]은 더 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격문을 회람시키는 한편, 1919년 3월 29일부터 다음 날인 30일 사이에 일부 주민들과 함께 광릉천(光陵川)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박석몽도 56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주동자 중 한 명이다.
1919년 3월 31일 박석몽은 이재일·최영갑(崔永甲)[?~?]·최대봉(崔大奉)[1898~?]·양삼돌(梁三乭)[?~?]·유희상(柳熙庠)[1881~?]·이흥록(李興祿)[1853~1921]·최대복(崔大福)[1892~?] 등과 함께 광릉천 변에 모인 수백 명의 주민을 선동하였다. 시위대의 기세가 오르고 독립 만세 시위도 절정에 이르렀으나, 곧바로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는 결국 중단되고 시위대도 해산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독립 만세 시위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총 22회의 만세 시위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박석몽은 부평리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박석몽은 판결에 불복하여 함께 기소된 이들과 공동으로 항소하였고, 1919년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박석몽에게 200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와 여기에 참여한 박석몽 등 여러 인물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9년 진접3·1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진접3·1운동기념비는 2019년 11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진접중학교[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5-1] 정문 안으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