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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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적실마을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기중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자연 마을.
[개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의 발생지라 할 수 있는 석실마을이 있다.
[명칭 유래]
석실마을은 본래 ‘적실’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김상헌이 ‘적실’이 도적의 소굴을 의미하는 적실(賊室)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주변에 돌이 많다고 하여 ‘석실’로 고치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수석동의 석실서원 묘정비가 옮겨 오게 되면서부터 ‘석실’이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한편, 수석동에 위치한 석실마을은 안동 김씨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을 기리기 위한 사우가 설치되고 이후 석실서원으로 사액받게 되면서 마을 명칭도 ‘석실’이 된 것으로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은 안동 김씨가 세거하며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곳으로 유명하다. 석실마을이 형성되고 안동 김씨가 세거하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설화가 전해진다. 덕소리 지역은 안동 김씨가 입향하기 이전까지 남양 홍씨의 세거지로 일대의 산이 모두 남양 홍씨 문중의 선산이었다. 남양 홍씨 문중은 조선 초 예조정랑, 경기도사, 평양서윤 등을 역임하였던 안동 김씨 김번(金璠)[1479~1544]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후 안동 김씨 일가의 며느리였던 홍씨 부인의 친정아버지가 사망하여 남양 홍씨 문중에서는 홍씨 부인의 아버지를 안장할 자리를 미리 지정해 놓았다.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 즉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형태로 근방에서 명당자리였다고 한다. 명당임을 알았던 홍씨 부인은 밤새 물을 길러 안장할 자리에 부었고, 물이 차 있자 홍씨 부인 아버지의 시신은 안장되지 못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김번이 사망하자 홍씨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옥호저수형 명당에 이장시켰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안동 김씨 김번 일가가 이주하게 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설화에 대해 일각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김번의 묘가 위치하게 된 까닭은 세조의 국사(國師)이자 김번의 큰아버지인 학조대사가 남양 홍씨의 땅에 김번의 묏자리를 지정하여 안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김번의 묘가 위치함에 따라 김번의 후손들이 입향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김번이 덕소리에 안장된 이후 안동 김씨의 세거지이자 세장지(世葬地)가 되었다. 석실마을에 세거한 안동 김씨 중에는 조선 초부터 조선 후기까지 고위 관료가 다수 배출되었다. 그중에서도 병자호란 당시 충절과 대의로 명성을 얻었던 김상용과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 이후부터는 조선의 대표적인 세도가가 되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묘가 석실마을에 위치하게 되면서, 김상용과 김상헌의 후손들이 주로 세거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였던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과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초가 되는 김조순이 석실마을에 세거한 김상용, 김상헌의 후손들이었다.
[자연환경]
덕소리에 위치한 석실마을은 남향을 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야산이 둘러싸여 있다. 석실마을에는 앞서 설화에서도 언급하였듯 ‘옥호저수형’의 명당이 있다. 즉 옥병에 물이 담긴 형상인데, 덕소리쪽이 병 입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안동 김씨 김번의 묘소는 병 입구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한편, 덕소리 쪽은 안릉안, 율석리 쪽을 박릉안이라고 부르는데, 능터의 안쪽, 능터의 바깥쪽이라는 뜻이다.
[현황]
오늘날 덕소리와 수석동의 석실마을에서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발생지라는 명칭과는 달리 그 위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수석동 석실서원 터에는 양주 조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터에는 ‘석실서원지’ 표석만이 존재하고 있다. 덕소리 석실마을은 안동 김씨의 후손이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거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집성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대신 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수석동의 석실마을
남양주시에는 두 곳의 석실마을이 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덕소리 석실마을이며 또 다른 곳은 수석동에 있다. 수석동에는 1656년(효종 7) 지방 유림의 공의에 따라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가 건립되었고, 위패가 봉안되었다. 이후 1663년(현종 4) ‘석실(石室)’의 명칭으로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했다. 수석동 석실마을은 석실서원이 위치한 것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석실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안동 김씨가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석동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세도가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흥선대원군의 의도에 따라 실시된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고 김상헌의 위패는 땅에 묻혔다. 더욱이 1900년(고종 4), 금곡[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명성왕후 민씨의 능인 홍릉이 건립되면서 홍릉 자리에 위치했던 조선 초 문신 조말생의 묘가 석실서원지로 이전되었다. 이처럼 석실마을의 중심이 되었던 석실서원이 폐허가 되자, 안동 김씨 문중은 석실서원 묘정비를 덕소리로 옮겨 왔다. 그로 인해 본래 ‘적실마을’로 불렸던 덕소리의 안동 김씨의 세거지가 ‘석실마을’로 명명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구획된 행정구역에 따르면 수석동의 경우 더 이상 안동 김씨의 세거지로 정체성을 보이지 못함에 따라 덕소리 적실마을이 석실마을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