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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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元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명학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김원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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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김원석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김원석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김원석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2일 - 김원석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선고 |
출생지 | 월산리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
거주|이주지 | 월산리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
활동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3·1운동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원석(金元石)[1890~?]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 월산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는 3·1운동의 취지에 동조하는 동시에 정치 변혁을 추구하는 여러 인사들이 1919년 3월 16일 이달용(李達鎔)[1889~1919]의 적극적인 권유 아래 화도면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에 있는 월산교회에 모여 만세 시위의 시기와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거사 날짜로 정하여진 1919년 3월 18일 밤 10시경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 주민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헌병주재소 앞에 집결하여 행진 도중에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였다. 이때 김원석은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면서 있는 힘껏 소리 높여 ‘조선 독립 만세’를 주창하였다. 점점 격화되어 가는 시위의 기세를 꺾으려는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발포로 5명이 현장에서 죽고 6명이 중상을 입는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김원석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귀가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19일 일본 헌병이 만세 시위 가담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화도면 일대에 출동하였을 때 김원석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김필규(金弼圭), 남궁우룡(南宮又龍), 윤준(尹俊), 이승면(李承冕), 이윤원(李允遠)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곧바로 재판에 회부된 김원석은 1919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