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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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允植 |
영어공식명칭 | Kim Yunsik |
이칭/별칭 | 순경(洵卿),운양(雲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진아 |
출생 시기/일시 | 1835년 - 김윤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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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64년 - 김윤식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김윤식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76년 - 김윤식 황해도 암행어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2년 9월 8일 - 김윤식 강화부유수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김윤식 협판군국사무·기기국총판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1월 21일 - 김윤식 사망 |
거주|이주지 | 김윤식 거주지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
유배|이배지 | 김윤식 유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
유배|이배지 | 김윤식 유배지 - 제주특별자치도 |
유배|이배지 | 김윤식 유배지 -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
묘소|단소 | 김윤식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경강로399번길 81-3[삼패동 산41-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청풍(淸風) |
대표 관직 | 외부아문대신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묘소가 있는 개항기 문신.
[가계]
김윤식(金允植)[1835~1922]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기건(金基建)이고, 할아버지는 김용선(金用善)이다. 아버지는 김익태(金益泰)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다.
[활동 사항]
김윤식은 1835년(헌종 1)에 태어났다. 184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 양평읍]에 거주하던 숙부 김익정(金益鼎)의 슬하에서 자랐다. 유신환(兪莘煥)과 박규수(朴珪壽)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6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74년(고종 11) 치러진 증광시에 병과 7위로 급제하였다. 1876년 황해도 암행어사를 역임하였고, 1881년 영선사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대미(對美) 수교 교섭을 진행하였다. 1882년 9월 8일 강화부유수로 부임하였고, 1883년 협판군국사무와 기기국총판을 역임하였다.
김윤식은 1887년 탄핵을 받아 충청도 면천군[현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유배되었고, 1894년 정계에 복귀하여 갑오개혁에 참여한 뒤 독판교섭통상사무와 외부아문대신을 역임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이 일어난 뒤 외무아문대신직에서 면직되고 1897년 다시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목[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3년 6개월간, 전라남도 지도군[현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에서 6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김윤식은 1907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1908년 중추원의장에 임명되어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에는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조선총독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제출하였으며, 이 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김윤식은 1922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윤식의 저술로는 1881년부터 1883년까지의 일기인 『음청사(陰晴史)』와 1887년부터 1921년까지의 일기인 『속음청사(續陰晴史)』, 1914년에 간행된 문집 『운양집(雲養集)』이 전한다.
[묘소]
김윤식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경강로399번길 81-3[삼패동 산41-1]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윤식은 1910년 8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