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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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楊州 寺刹 紀行 |
영어공식명칭 | Trip to Namyangju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선기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찰들을 거닐면서 오감으로 느끼는 기행.
[개설]
경기도 남양주시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다. 곳곳에 스며든 역사와 문화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은 생명수처럼 흐르고 있으며 남양주시의 안과 밖을 잇는 수많은 산들이 장관을 이루면서 이어진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또 강과 산을 가진 멋들어진 지세 때문이었을까. 남양주 지역은 조선 시대의 수많은 왕들이 잠들어 있으며, 명복을 기원하는 원당 사찰을 비롯하여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찰들이 바둑알처럼 분포한다. 남양주시의 사찰들을 통해서 자연 경관을 감상하고, 아울러 전통과 현대를 잇는 역사와 문화 학습의 장으로 떠나 보자.
[남양주의 사찰 분포]
남양주는 광주산맥 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곳곳에 많은 산지가 존재한다. 남양주시청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천마산(天摩山)과 묘적산(妙寂山), 서쪽에는 수락산(水落山)과 불암산(佛巖山), 북쪽에는 운악산(雲岳山)과 천겸산(泉岒山), 남쪽에는 운길산(雲吉山)과 예봉산(禮峯山)이 자리하고 있다. 산 속에는 오래전부터 조성된 사찰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동쪽 천마산에는 견성암(見聖庵), 보광사(寶光寺), 봉인사(奉印寺)가 있고 묘적산에는 묘적사(妙寂寺)가 있다. 서쪽 수락산에는 내원암(內院庵)과 흥국사(興國寺), 불암산에는 불암사(佛巖寺)와 천보사(天寶寺)가 있다. 북쪽 운악산에는 봉선사(奉先寺), 천겸산에는 봉영사(奉永寺)가 있으며 남쪽 운길산에는 수종사(水鍾寺)가 있다. 사찰들은 일 년 내내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조선 왕실의 원당]
남양주에는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원당 사찰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 원당은 왕실 구성원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남양주에 있는 조선 왕실의 원당은 특히, 세조(世祖)와 선조(宣祖) 그리고 정조(正祖)와 순조(純祖)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조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인 광릉(光陵) 곁에는 봉선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선사는 고려 시대인 969년(광종 20)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운악산에 광릉이 조성되면서 1469년(예종 1) 정희왕후가 사찰의 건축을 명하였고, 이후 사세(寺勢)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현존하는 봉선사의 전각들은 6·25전쟁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문집 『식우집(拭疣集)』에 실린 「봉선사기(奉先寺記)」에 따르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한 전각에서부터 ‘방적당(訪迹堂)’이라는 명칭의 승당(僧堂)과 ‘운하당(雲霞堂)’이라는 명칭의 선당(禪堂)이 있었고 운집료(雲集寮) 등 다수의 요사(寮舍)가 있었는데, 규모가 총 89칸이라 하여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어실(御室)인 숭은전(崇恩殿)이 건립되었다. 숭은전은 성종 대 봉선전(奉先殿)으로 개칭되었다. 봉선전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불이 치러졌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왕실에서 헌관(獻官)을 보내 재를 치르게 하였다.
봉선사는 문정왕후에 의하여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兩宗)이 복립된 이후인 1551년(명종 6) 교종판사(敎宗判事) 수진(守眞)을 주지로 임명하면서 전국의 교종 사찰을 관장하는 중심 사찰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566년(명종 21) 양종이 재차 혁파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봉선전에 있던 세조의 어진은 봉선전에 머물던 삼행(三行)이라는 승려가 안전하게 보관하여 의주의 행재소에 모셔졌다. 이후 1637년(인조 15) 승려 계민(戒敏)에 의해 중창되었고 17~19세기에 걸쳐 꾸준히 관리·운영되었다.
1914년부터는 월초(月初)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1959년 범종각을 건립하기 시작하면서 차례로 중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한편 1469년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봉선사의 동종은 남양주 봉선사 동종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불암사 또한 세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불암사는 1629년에 세워진 천보산 불암사 사적비(天寶山 佛巖寺 事蹟碑)에 따르면 824년(신라 헌덕왕 16) 지증국사(智證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전기까지 불암사에 관한 구체적인 연혁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세조 대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에 원당을 정할 때 불암사가 그중 하나로 지정되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세조와의 인연이 확인되는 것이다. 한편 불암사는 인근의 석천암(石泉庵)과 함께 조선 시대 동구릉과 태릉, 강릉 등 총 11기에서 소비되는 물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782년(정조 6) 승려 서악(瑞岳)이 전각을 중수한 이후 현대까지 꾸준히 중창이 이루어졌다. 특히 1989년에는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받아와서 진신사리보탑을 세워 봉안하기도 하였다. 불암사에는 금강경(金剛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 30여 종의 경판(經板)이 전해진다. 불암사경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흥국사는 599년(신라 진평왕 21) 원광(圓光)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568년(선조 1) 선조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을 지으면서 ‘흥덕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인근의 덕흥대원군 능을 ‘덕릉’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흥국사를 ‘덕절’로 부르기도 한다. ‘덕릉’의 명칭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를 왕릉으로 추존하고 싶었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여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에 한 내시가 ‘나무꾼들이 나무를 지고 오거나 숯을 팔기 위해 고개를 넘어올 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 뒤 덕릉고개를 넘어왔다고 하면 밥과 술을 대접하고 값도 후하게 쳐주자’고 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를 따르자 ‘덕릉’이라는 명칭이 입소문이 나게 되어 덕흥대원군의 묘가 덕릉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후 1626년(인조 4)에 다시 흥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793년(정조 17)과 1818년(순조 18)에는 왕실에서 내탕금을 내어 사찰을 중수하게 하였다. 또한 흥국사는 근대기 화승(畵僧) 양성소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인지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불화(佛畵) 등의 다수의 성보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봉영사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창건되어 봉인암(奉仁庵)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이후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고 1737년(영조 13)에 태전(太顚) 등의 승려가 사찰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묘가 순강원(順康園)으로 승격되면서 본 사찰을 원당으로 삼았다. 이때 사찰의 이름을 ‘봉영사’라 부르게 되었다. 1877년(고종 14) 왕실의 내탕금으로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20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중수되었다.
내원암은 정조, 순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순조의 탄생 설화가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얻었지만 태어난 지 5년째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정조는 계속하여 아들을 갈망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설화에 의하면 왕자 탄생을 바라던 정조는 파계사(把溪寺)에 고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후손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를 청하였다. 이에 고승은 본 내원암에서 300일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가 어느 늙은 승려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1790년(정조 14) 순조를 출산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정조의 명으로 1794년(정조 18) 내원암에 칠성각(七星閣)을, 1796년(정조 20)에는 사성전(四聖殿)을 건설하였다. 또한 순조 대인 1825년(순조 25)과 1831년(순조 31)에도 왕실의 내탕금으로 내원암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찰의 전각들은 6·25전쟁에 의해 전소되었고 1955년부터 점차 중건이 이루어져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사찰들은 조선 시대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된 이후 사격(寺格)이 크게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남양주 지역의 사찰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조선 왕실의 도움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
남양주의 사찰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천마산 서쪽에 위치한 견성암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었던 조맹(趙孟)의 후손들이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조맹은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시조로 만년에 은거하면서 도를 닦다가 약사불(藥師佛)을 친견(親見)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후손들이 선조의 유적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중엽에 사찰을 창건하고 약사불을 친견하였다는 의미로 ‘견성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견성암은 1860년(철종 11) 혜소(慧昭)가 법당 등을 중창하였는데, 혜소 또한 풍양 조씨의 후손이다. 또한 「봉선사본말사약지(奉先寺本末寺略誌)」에 의하면 1927년 무렵 사찰의 토지와 임야가 대부분 풍양 조씨 문중의 소유로 확인된다. 이를 볼 때, 견성암은 풍양 조씨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찰로 판단된다.
묘적사에는 국왕 직속의 비밀 기구가 있던 곳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묘적사는 비밀 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요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는데 두 차례는 잘 막았으나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와 함께 활터에 관한 설화도 전해진다. 사찰 동쪽에 있는 평탄한 대지를 ‘활터’라고 부른다. 설화에 따르면 승려들이 활터에서 무예를 익혀 무과(武科)에 응시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내용의 묘적사의 설화는 조선 시대 승려가 전란 때는 전투에 참여하고 평시에는 국가 방비에 힘썼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수종사에는 세조와의 인연이 담긴 중창 설화가 존재한다.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고자 강원도 오대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에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물 위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세조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관리를 보내 조사하게 하니 오래된 사찰의 폐허가 있었다. 바위에는 십팔나한상이 앉아 있었는데,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세조는 매우 감동하여 사찰을 중창하게 하고 이름을 ‘수종사’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찰에 얽힌 설화들은 해당 사찰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남양주 사찰 기행 코스]
남양주 사찰 기행 코스는 각각 목적에 따라 관광, 등산, 힐링 그리고 역사 탐방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광을 목적으로 한다면 ‘광릉숲 코스’를 추천한다. 광릉숲은 광릉과 봉선사를 비롯하여 국립수목원도 근처에 있어 자연과 역사를 감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또한 인근의 광릉숲 음식문화테마거리와 광릉 오일장에서는 전통시장의 향기와 사람들의 따뜻한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탈속과 세속이라는 부분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등산을 목적으로 한다면 ‘수락산과 불암산 코스’를 추천한다. 각각의 산은 남양주 팔경에도 포함되어 있는 만큼 산세와 풍광이 매우 뛰어난 곳이라 할 수 있다. 산행 중에 내원암과 흥국사 그리고 불암사와 천보사에 들린다면 산의 정취와 함께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힐링을 위한 코스로는 ‘템플스테이’를 추천한다. 봉인사와 묘적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데, 봉인사와 묘적사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접근이 용이한 장점도 있다. 템플스테이를 통해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나를 바라보고 나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 탐방의 추천 코스로는 ‘수종사 코스’가 있다. 수종사 인근에는 정약용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코스를 따라 수종사에서 세조의 감응을 느끼고 정약용유적지에서 정약용의 정취를 느낀다면 조선 시대의 남양주 모습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