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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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顯周 |
영어공식명칭 | Hong Hyeonju |
이칭/별칭 | 세숙(世叔),해거재(海居齋),해도인(海道人),약헌(約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홍병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약용과 교유하고 수종사에 대한 예술 작품을 남긴 조선 후기 정조의 부마.
[가계]
홍현주(洪顯周)[1793~1865]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해도인(海道人)·약헌(約軒)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홍낙성(洪樂性)이며 아버지는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인모(洪仁謨)이다. 어머니는 달성(達城) 서씨(徐氏)이다. 형은 홍석주(洪奭周)·홍길주(洪吉周)이며, 누나는 유한당(幽閑堂) 홍원주(洪原周)이다. 부인은 숙선옹주(淑善翁主)이고 아들은 홍우철(洪祐喆)이다.
[활동 사항]
홍현주는 1793년(정조 17)에 태어났다. 1804년(순조 4) 정조와 가순궁(嘉順宮)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딸이자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의 친동생인 숙선옹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어 영명위(永明尉)에 봉하여졌다.
홍현주는 부마로서 의빈부(儀賓府)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후 순조에서 고종 시기 정순왕후 김씨·혜경궁 홍씨·효의왕후 김씨·가순궁 박씨·훗날 익종(翼宗)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순조·헌종·순원왕후 김씨·철종 등의 국상 때마다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윤정현(尹定鉉)의 문집 『침계유고(梣溪遺稿)』에 수록된 시장(諡狀)에 의거하면, 홍현주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비롯하여 장흥고(長興庫)·사도시(司䆃寺)·제용감(濟用監)·평시서(平市署) 등의 제조(提調)를 역임하였는데 명예직 위주의 관직은 부마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 “일찍이 부마로 뽑혔기에 학문에 뜻을 두었음에도 나아가지 못하여 서화를 지극히 좋아하게 되었다[早以儀賓選 志學而未就 顧酷嗜書畫]”라고 한 형 홍석주의 진단이 보여 주듯, 이와 같은 사회적 제약에 따른 상실감은 홍현주가 한평생 서화의 수집과 문예 활동 및 학술 교류에 열성적이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해석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따르면 한성부(漢城府) 남부(南部) 이전동(履廛洞)에 있었던 홍현주의 집에는 ‘원정(園亭)’이라고 쓴 순조의 어필과 ‘시림정(市林亭)’이라고 쓴 효명세자의 어필이 있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홍현주는 1809년 순조로부터 하사받은 김홍도(金弘道)의 금강산 화첩 『해산첩(海山帖)』을 비롯하여 다수의 서화와 금석문을 수집하였다. 중국으로 사행을 다녀오는 지인들을 통하여 연경(燕京)에서 2만여 권에 달하는 서적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모아들인 다량의 수집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1812년 동호(東湖) 근처에 진경재(眞境齋)를 지었으나, 수집품이 계속 늘어나면서 진경재만으로는 이를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추가로 보회당(寶繪堂)이라는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홍현주는 정약용(丁若鏞)·정학연(丁學淵) 부자를 비롯하여 이명오(李明五)·이만용(李晩用) 부자와 김정희(金正喜)·서유구(徐有榘)·신위(申緯)·신헌(申櫶)·심상규(沈象奎)·이상적(李尙迪)·이조묵(李祖默)·홍한주(洪翰周)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학자들은 물론 불교계 인물인 초의선사(草衣禪師)나 섭지선(葉志詵)·오숭량(吳嵩梁)·옹수곤(翁樹崑)·장심(張深)·탁병념(卓秉恬) 등의 청(淸)나라 문인·학자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특히 정약용과의 친분이 유명하다. 이는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 정약용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일례로 1830년 홍현주가 방문하자 정약용이 농어를 잡아 대접하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한 마리밖에 잡지 못하였다고 하거나 1831년 홍현주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 수종사에 가려 하는데 정약용은 나이가 들어 함께하지 못하여 아쉬움을 토로하는 등의 여러 시문을 통하여 홍현주와 정약용 간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1865년(고종 2)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홍현주의 저술로는 시문집인 『해거재시집(海居齋詩集)』·『해거재시초(海居齋詩鈔)』 등을 종합한 『홍현주시문고(洪顯周詩文稿)』와 간찰(簡札) 20여 편을 한데 모은 『해거재첩서(海居齋帖書)』 등이 현전한다. 그 외에도 소장한 장서 목록을 정리한 『해거서목(海居書目)』 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홍현주는 시서 외에도 다수의 회화 작품을 남겼다. 그중 1830년 정학연·정학유(丁學游) 형제와 초의선사 등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 수종사에 올라 노닐면서 당시의 경험을 시문과 서화로 기록하였다는 『수종시유첩(水鐘詩遊帖)』을 비롯하여 「진인은서(眞人隱棲)」·「구리입정(九里笠亭)」 등의 산수화와 「묵란(墨蘭)」·「묵죽(墨竹)」 등의 사군자화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묘소]
홍현주는 앞서 1836년(헌종 2) 사망한 숙선옹주와의 합장묘 형태로 경기 양주(楊州)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경기도 양주시 옥정택지개발지구에 묘역 일대가 포함되면서 2010년 풍산 홍씨 문중의 주도로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861-1 풍산 홍씨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묘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숙선옹주의 원삼(圓衫)에 사용된 흉배(胸褙) 2점이 출토되어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