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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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白石 |
영어공식명칭 | Han Baek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형열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 한백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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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 - 한백석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 만세 시위에 참여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한백석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오남리 -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3·1운동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1일 경성부 인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후 독립 만세 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를 포함하는 경기도 양주군도 당시 3·1운동이 활기차게 일어난 지역 중 한 곳으로, 3월 13일 이래로 4월 초순까지 20여 회에 달하는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계]
한백석(韓白石)[1870~?]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한백석은 1919년 3월 29일 오남리 마을 사람들인 나상규(羅相奎)·엄본성(嚴本成)·이종갑(李鍾甲)·여원필(呂元弼)·권노적(權魯赤)·손삼남(孫三南) 등과 함께 수십 명의 군중을 이끌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해당 시위는 일제에 의하여 해산되었고, 시위 후 체포된 한백석은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해당 판결문은 한백석이 “손병희(孫秉凞) 등의 조선 독립선언의 취지에 찬동하여 모두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1919년 3월 29일경 피고들의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에서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한백석은 판결에 불복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공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은 공소를 기각하였고, 이에 불복한 한백석이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한백석에게 200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