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88 |
---|---|
한자 | 金錫魯 |
영어공식명칭 | Kim Seokr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김석로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1919년 3월 30일 - 김석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서 3·1운동 격문 배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9일 - 김석로 징역 1년 6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4월 28일 - 김석로 출옥 |
출생지 | 여주 - 경기도 여주시 |
거주|이주지 | 창성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
활동지 |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
[가계]
김석로(金錫魯)[1890~?]는 1890년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당시 경성부 창성동[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약종상을 하고 있던 김석로는 평소 친분을 쌓고 있던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의 승려 이순재(李淳載)·김성암(金星岩)[후일 김성숙으로 개명]·강완주(姜完珠)와 함께 부평리 인근 주민들을 모아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김석로 등은 만세 운동을 진행하기 위하여 1919년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서 ‘조선 독립단 임시 사무소’ 명의로 격문을 만들었다.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운동하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라는 취지였다. 김석로는 이순재·김성암과 함께 편집한 해당 격문을 등사판으로 약 200매를 인쇄하였다.
김석로는 이순재·강완수 등과 함께 1919년 3월 29일 오후 9시부터 다음 날인 30일 오전 5시까지 진접면 부평리·진벌리·중촌리 등의 민가에 격문을 배부하였다. 3월 31일 부평리의 광릉천 일대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된 것은 김석로 등의 해당 활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김석로와 동지들은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김석로는 불복하여 공소하였고, 1919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김석로는 유죄 판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재차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형이 확정되었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한 뒤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