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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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在七 |
영어공식명칭 | Hong Jae-chi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진아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 홍재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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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6월 - 홍재칠 동우회 창립 발기인 겸 이사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7월 - 홍재칠 고종 양위 반대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7월 - 홍재칠 내란죄 판결로 10년 유배형 언도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11월 17일 - 홍재칠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홍재칠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
활동지 | 한성부 - 서울특별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홍재칠(洪在七)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해당하는 양주군 건천면 독정 출신으로 독립운동 단체인 동우회에서 활동하였고, 1907년 7월 고종 양위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활동 사항]
동우회(同友會)는 1907년 6월에 한국 독립의 기초를 닦는 일을 목적으로 창립된 단체이다. 홍재칠은 동우회의 창립 발기인·이사(理事)로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당시 고종(高宗)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양위를 강요받은 상태였다. 여기에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조선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자 세간에는 고종이 양위할 것이며 헤이그 밀사 사건을 사죄하기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한다는 소문,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 국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는 가운데 동우회에서는 집회·연설의 방식으로 반대 시위를 전개하였고, 특히 석고단(石鼓壇)에서 고종의 일본 방문을 저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홍재칠은 동우회의 반대 시위와 석고단 결의에 함께하다 윤이병(尹履炳)·심원택(沈源澤)·홍재설(洪在卨) 등 다른 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경무관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홍재칠은 1907년 12월 평리원(平理院)에서 내란죄 판결과 10년 유배형을 받았고, 전라남도 지도군[현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상훈과 추모]
홍재칠은 2015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