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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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壽興 |
영어공식명칭 | Kim Swuhung |
이칭/별칭 | 기지(起之),퇴우당(退憂堂),문익(文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채용 |
출생 시기/일시 | 1626년 10월 26일 - 김수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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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김수흥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55년 - 김수흥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6년 - 김수흥 문과 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8년 - 김수흥 홍문관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김수흥 동부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8년 - 김수흥 호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3년 - 김수흥 우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4년 - 김수흥 영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4년 - 김수흥 강원도 춘천에 중도부처 |
활동 시기/일시 | 1675년 - 김수흥 방면 |
활동 시기/일시 | 1688년 - 김수흥 영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김수흥 경상도 장기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690년 10월 12일 - 김수흥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94년 - 김수흥 복관 |
유배|이배지 | 장기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
묘소|단소 | 김수흥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석실로336번길 11-63[덕소리 산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김수흥(金壽興)[1626~1690]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대효(金大孝)이고,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아버지는 김광찬(金光燦)이고, 어머니는 김래(金琜)의 딸인 연안 김씨(延安 金氏)이다. 부인은 윤형각(尹衡覺)의 딸 남원 윤씨(南原 尹氏)이며, 아들은 김창렬(金昌烈)·김창열(金昌說)이다. 사위는 홍택보(洪澤普)·송광속(宋光涑)·이희조(李喜朝)·이만성(李晩成)·이성좌(李聖佐)이다. 형은 김수증(金壽增)이고, 동생은 김수항(金壽恒)·김수징(金壽徵)·김수응(金壽應)·김수능(金壽能)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인 김광혁(金光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김수흥은 1626년(인조 4) 10월 26일 태어났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5년(효종 6) 치러진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였다. 1656년 문과 중시에도 급제하여 승문원의 주서·한림 등을 거쳐 1658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이후 이조정랑 등 요직을 거치고서 1661년(현종 2) 동부승지에 올랐다. 1668년에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673년 우의정이 되었다. 1674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2차 예송(禮訟)에서 남인의 예론이 받아들여지자 서인이었던 김수흥은 강원도 춘천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675년(숙종 1)에 방면되어 직첩을 돌려받았지만, 집권 세력인 남인들이 계속 처벌을 주장하여 의금부에서 대죄하였다.
김수흥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고 동생 김수항이 영의정이 되면서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곧장 사은사가 되어 북경으로 떠났다. 1686년 스승 송시열이 주석을 단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간행을 청하였고, 1688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다시금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간의 논박을 받아 장기(長鬐)에 안치되었고, 1690년 10월 12일 유배지 장기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수흥의 저술로는 문집인 『퇴우당집(退憂堂集)』 5책이 전한다. 아들 김창열이 임피현령으로 재직 중이던 1710년에 간행하였다.
[묘소]
김수흥의 묘소는 남양주시 와부읍 석실로336번길 11-63[덕소리 산5]의 안동 김씨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수흥은 1694년 관작이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