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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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習 |
영어공식명칭 | Kim Siseup |
이칭/별칭 | 열경(悅卿),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설잠(雪岑),청간(淸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연주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락산에 은거하였던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승려.
[가계]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시습(時習)은 속명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안주목사(安州牧使) 김구주(金久住)[혹은 김윤주(金允柱)]이고, 할아버지는 오위부장(五衛部將) 김겸간(金謙侃)[혹은 김원간(金元侃)]이며,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 김일성(金日省)이다. 어머니는 울진 장씨(蔚珍 張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은 안씨(安氏)이다.
[활동 사항]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에 한성(漢城) 성균관 북쪽 반궁리[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고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생육신 중 한 명이다. 1582년(선조 15) 선조(宣祖)의 명을 받아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에 따르면 김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 이웃에 살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따와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3살 때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시를 지을 줄 알았다. 5세에 세종이 친히 불러 시를 짓도록 시험해 본 후 매우 감탄하여 비단을 하사할 정도로 신동(神童)이었다. 1453년(단종 1) 감시(監試)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1455년(세조 1)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폐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승려가 되어 법호를 ‘설잠(雪岑)’이라고 하였다.
『김시습전』에 따르면 김시습은 시국에 상심하고 분개하여 방외(方外)에 노닐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그곳에서 묵었다고 한다. 1471년(성종 2) 서울로 올라온 김시습은 이듬해인 1472년부터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양주(楊州)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의 「간폭정기(看瀑亭記)」에 옥류폭포 옆 간폭정(看瀑亭)에서 5리[약 2㎞]를 오르면 김시습 구지(舊址)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수락정사는 현재의 내원암(內院庵)[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579] 근처로 추정된다. 김시습은 수락정사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호를 ‘동봉(東峰)’이라고 삼았는데, 수락산이 서울의 동쪽에 있는 산이었기 때문에 ‘동봉’이라고 한 것이다.
이하조의 「유수락산기(遊水落山記)」에 따르면 수락산 금류폭포 위 바위에 ‘금류동천(金流洞天)’[현 내원암 부근]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김시습이 지었다고 한다. 1481년(성종 12) 머리를 기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냈으며, 안씨(安氏)와 혼인하면서 환속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안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1493년(성종 24)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현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6]에서 59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시습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매월당집』, 『금오신화』,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관호록』 등이 있으며 불교 관련 주석서인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도 있다. 남양주 수락산과 관련하여 「수락잔조(水落殘照)」[수락산 노을 무렵]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묘소]
김시습의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부여 무량사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상훈과 추모]
1582년(선조 15) 선조가 이이(李珥)에게 『김시습전』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며, 1699년(숙종 25) 사헌부집의(執議)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 정조가 청간(淸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시습은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 두었는데, 송시열의 「홍산현동봉사기(鴻山縣東峯祠記)」와 윤증의 「청풍각기」에는 1621년(광해군 13) 심종직이 홍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무량사 곁에 작은 제각을 짓고 김시습의 진영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곳이 청풍각이 되었으며 이후 부여 홍산향교 근처로 옮겨 1703년(숙종 29) 청일사(淸逸祠)[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190]라고 사액하였는데 김시습의 호를 따 동봉서원이라고도 불렸다.
1661년(현종 2) 윤선거는 김시습 추숭 사업을 진행하면서 부여 홍산현[현 부여군 홍산면]에 동봉사(東峯祠)를 건립하였다. 서계(西溪) 박세당은 1683년(숙종 9) 수락산에 은거하면서 수락동천에 김시습을 기리는 동봉영당[현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산146-1 노강서원 터]을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1686(숙종 12)년 완공되어 1700(숙종 26)년 ‘청절사(淸節祠)’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현재 청절사 자리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이건되어 있어 남아 있지 않다.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는 수락산에 석림암[현 석림사]을 중건하여 김시습의 명복을 기리는 장소로 삼았다. 1791년(정조 15) 단종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등 10명의 충신을 제향하기 위해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에 세워진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추가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