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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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園(興宣大院王)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민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818년 - 여흥 민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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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820년 12월 21일 - 이하응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898년 - 여흥 민씨 사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898년 2월 2일 - 이하응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898년 - 흥원(흥선대원왕) 조성 |
이장 시기/일시 | 1966년 - 흥원(흥선대원왕) 이장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8년 10월 10일 - 흥원(흥선대원왕)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흥원(흥선대원왕)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경기도 기념물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흥원(흥선대원왕)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
성격 | 묘 |
양식 | 개석귀부[신도비]|원부방부[표석] |
관련 인물 | 이하응|여흥 민씨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
[개설]
흥원(흥선대원왕)[興園(興宣大院王)]은 흥선대원왕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묘소이다. 이하응은 자(字)가 시백(時伯), 호(號)는 석파(石坡)이며, 조선 제26대 고종(高宗)의 사친(私親)이다.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1788~1836]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이다. 남연군이 은신군(恩信君)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남연군 일가는 영조(英祖)의 현손(玄孫)으로 종친이 되었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 이하응은 1843년 ‘흥선군(興宣君)‘으로 봉해졌으며, 1865년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이하응은 ‘대원군(大院君)‘에 봉해지고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수렴청정을 도왔다. 이하응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쇄국 정책을 단행하였으며,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으로 청(淸) 톈진[天津]에서 4년간 유폐되기도 하였다.
1907년 이하응은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으로 추존되었으며 ‘헌의(獻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부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여흥 민씨(驪興 閔氏)[1818~1898]는 ‘여흥대원왕비(驪興大院王妃)’로 추증되고 ‘순목(純穆)’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묘소도 ‘흥원(興園)’으로 높여졌다. 흥원(흥선대원왕)은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흥원(흥선대원왕)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번지에 있다.
[변천]
흥원(흥선대원왕)이 최초로 조성된 것은 1898년으로 1898년 1월 8일 여흥부대부인이 사망하여 공덕리(孔德里)[현 서울시 마포구]에 3월 13일 안장(安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898년 2월 2일 이하응이 사망하면서 예장청(禮葬廳)이 합설되고, 윤3월 26일 합동으로 안장되었다. 흥원(흥선대원왕)은 1907년 11월 천봉이 시작되어 1908년 2월 마쳤으며, 파주 운천면(雲川面) 대덕동(大德洞)으로 옮겼다. 인조(仁祖) 장릉(長陵)의 옛터 국내(局內)였다. 이때 석물들은 1898년 제작한 것을 옮겨 사용하였으며, 신도비를 새로 사용하였다. 흥원(흥선대원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966년이며, 이하응의 큰아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의 묘소가 1920년 옮겨오면서 이하응 일가의 묘소 조성이 시작되었다.
[형태]
흥원(흥선대원왕)은 창현리의 이하응 일가 묘역 중 가장 북쪽에 있다. 봉분으로 올라가는 진입로에 흥원신도비(興園神道碑)와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 표석이 건립되어 있다. 봉분은 합장(合葬) 단분(單墳)으로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으며, 석양(石羊)과 곡장(曲墻)이 뒤쪽으로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좌우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가 차례로 건립되어 있다.
[금석문]
흥원(흥선대원왕)의 신도비는 개석귀부(蓋石龜趺) 형태이며, 1908년 건립되었다. 비문의 첫머리에 ‘대한 흥선헌의대원왕 흥원신도비명(大韓 興宣獻懿大院王 興園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글은 김학진(金鶴鎭)[1838~1917]이 짓고, 이재극(李載克)[1864~1927]이 썼다. 1905년 건립된 국태공원소 표석은 원부방부(圓首方趺) 형태와 유사하며, 앞면에 예서(隸書) 큰 글자로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고 쓰고 ‘의미 서(意美書)’라고 하였는데 글씨를 쓴 ‘의미’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다.
[의의와 평가]
흥원(흥선대원왕)에는 조선 시대 묘제의 전통과 19세기 말 새로운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석물이 다수 제작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문인석은 전통적인 복두공복(幞頭公服)의 형태이지만 얼굴 표현에서 현대적 사실성이 엿보인다. 또한 장명등, 신도비 등은 전통적인 형태이지만 국태공원소 표석은 전통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