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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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完興君 李載冕 墓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845년 - 이재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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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912년 - 이재면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912년 - 완흥군 이재면 묘 조성 |
조성 시기/일시 | 1913년 - 완흥군 이재면 묘 신도비 건립 |
이장 시기/일시 | 1920년 - 환흥군 이재면 묘 창현리로 이장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2년 - 완흥군 이재면 묘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완흥군 이재면 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
성격 | 묘|신도비 |
양식 | 개석귀부[신도비] |
관련 인물 | 이재면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개항기 왕족 완흥군 이재면의 묘.
[개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1845~1912]은 본관이 전주(全州),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큰아들이자 고종(高宗)의 친형이며,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1870~1917]의 아버지이다.
도승지,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청(淸)에 가서 감금 생활을 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봉양하고, 환국할 때 배종하였으며, 이후 약 10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을 역임하고, 1900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 1910년 6월 한일병합 실행 추진 단체인 대한평화협회의 총재에 선임되었고, 흥친왕(興親王)에 봉해졌다. 이완용 등 8명과 함께 황족 대표로 어전 회의에 참석하여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동의하였다. 이후 순종의 명에 의해 이희(李熹)로 개명하였으며, 한일병합조약 발효와 같은 날 일본 천황의 ‘조칙’에 의하여 이희공(李熹公)에 봉해졌다.
[위치]
완흥군 이재면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번지에 있다.
[변천]
완흥군 이재면 묘는 1912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고란대면(古蘭臺面) 풍곡동(楓谷洞)에 조성되었으며, 9년 뒤인 1920년 묘소를 현재 위치인 창현리(倉峴里)로 옮겼다. 이재면 묘소 서북쪽 약 120m 떨어진 곳에 흥선대원군의 묘소가 있는데 1966년 파주에서 옮겨 온 것이다.
[형태]
완흥군 이재면 묘는 봉분 주위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석양(石羊), 석호(石虎)가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문석인(文石人), 장명등(長明燈)이 건립되어 있다. 이재면 묘 앞쪽 25m에 있던 신도비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야외에 전시 중이다. 이재면 묘의 신도비는 개석귀부(蓋石龜趺) 형태이다.
[금석문]
완흥군 이재면 묘의 신도비는 비문을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짓고,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썼으며, 김성근(金聲根)[1835~1919]이 전자(篆字)를 썼다. 비문 끝에는 정만조(鄭萬朝)[1858~1936]가 추기(追記)를 남겼는데, 1913년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나 규모가 작아 20년이 지난 1932년 원래 비문과 글씨를 그대로 새겨 세웠다고 한다.
[현황]
완흥군 이재면 묘 서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흥선대원군 일가 납골묘가 있는데, 낙천군(洛川君), 은신군(恩信君), 이준용(李埈鎔), 이문용(李汶容), 이우(李鍝) 등 선조와 자손과 함께 흥친왕(興親王) 이재면의 납골묘가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완흥군 이재면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흥선대원군 일가 묘역 중 가장 처음 조성된 곳이며, 묘소 석물은 묘소를 옮긴 1920년대에 만든 것이다. 신도비는 1932년 다시 건립되었으며, 현재 이재면 신도비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완흥군 이재면 묘는 파묘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납골당도 함께 조성된 특수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