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81
한자 順和君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700[별내동 산201-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80년 - 이보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07년 - 이보 사망
조성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순화군묘 조성
현 소재지 순화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700[별내동 산201-1]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순화군|선조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있는 조선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묘.

[개설]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1580~1607]는 조선 제14대 선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빈 김씨(順嬪金氏)[?~1647]이다. 부인은 장수 황씨(長水黃氏)로 좌찬성으로 증직된 황혁(黃赫)의 딸이며,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의 손녀이다.

순화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강원도로 갔으며, 순화군의 장인 황혁과 아내의 할아버지 황정욱이 따라갔다. 이때 왜군이 함경도에 침입하자 향리 국경인(鞠景仁)[?~1592] 등이 임해군, 순화군 및 김귀영(金貴榮), 황정욱 등 왕자와 고관들을 잡아 왜군에게 넘겼다. 이때 임해군순화군은 왕자임을 내세워 행패를 부려 함경도민의 반감을 샀다. 안변(安邊), 밀양(密陽)을 거쳐 부산 다대포(多大浦)의 배에 구금되어 일본으로 가게 된 와중에 명(明)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1593년 8월 풀려났다.

순화군은 성격이 나빠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불법을 저질러 탄핵을 받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순화군이 죽인 사람이 1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01년 군호(君號)가 박탈당하였다가 사후에 복구되었다. 순화군은 아들이 없어서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慶)을 후사로 삼았으나 광해군 때 사사되어 진릉군의 조카 이장한(李長漢)을 오성군(烏城君)으로 봉하여 후사로 세웠으나 일찍 죽었다. 이후 인성군(仁城君)의 아들 해안군(海安君) 이억(李億)을 후사로 삼았다. 1774년 순화군에게 희민(僖敏)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위치]

순화군묘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산201-1번지에 있다.

[변천]

순화군이 1607년 사망하자 양주(楊州) 별비곡(別非谷)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할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소 동북쪽 약 1.5㎞ 거리이다.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순화군묘덕흥대원군 묘소 안에 있다고 하였다. 순화군묘 뒤에는 어머니 순빈 김씨의 묘소가 있다.

[형태]

순화군묘순화군과 부인 황씨의 쌍분(雙墳)으로 현대에 호석(護石)을 설치하여 놓았으며, 봉분 뒤쪽에는 곡장(曲墻) 대신 사성(莎城)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현대에 새로 건립한 묘표,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건립되어 있다. 좌우로 망주석(望柱石)과 금관조복(金冠朝服) 형태의 문인석이 있다.

[금석문]

순화군묘 묘표는 원수방부(圓首方趺) 형태였으나 최근 새롭게 건립하였다. 기존의 묘표는 총탄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앞면에 ‘□□□和□□之墓’, 뒷면에 ‘再壬寅’ 등의 글자만 판독 가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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