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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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基東 部隊 |
영어공식명칭 | Righteous Army of Kang Gi-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헌주 |
설립 시기/일시 | 1909년 4월 - 강기동 부대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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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11년 2월 - 강기동 부대 해산 |
성격 | 의병 부대 |
설립자 | 강기동 |
[정의]
개항기 경기도 남양주 등 경기도 북부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부대.
[개설]
강기동 부대는 의병장 강기동(姜基東)이 이은찬(李殷瓚)이 이끄는 경기 동북 지방 최대의 연합 의병 부대인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에 투신하여 활동하던 중, 1909년 3월 창의원수부가 일제의 토벌 작전에 의하여 해산되자 재조직한 의병 부대다. 창의원수부의 뒤를 이어 경기 동북 지방에서 치열한 의병 활동을 펼쳤으나 1910년 11월 초부터 일본군이 의병대토벌작전을 벌이자 이를 피해 북간도로 망명을 시도하던 중, 강기동의 체포로 해산되었다
강기동은 1884년 출생으로 1908년 6월 헌병보조원 제도가 시행되자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경기도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헌병 부대로 끌려온 의병들을 보고 의병들을 탈출시키고 강기동 자신도 탈출하였으며, 총과 탄환 등을 탈취하여서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설립 목적]
강기동 부대를 비롯한 개항기의 의병은 일본제국주의 국권 침탈에 맞서 국권을 지키고자 일어났다.
[변천]
강기동 부대는 1908년 이은찬이 조직한 의병 부대 창의원수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09년 2월 한 달 동안 19회에 달하는 전투를 전개한 창의원수부는 2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석적면 항동 부근의 돌압산전투(乭壓山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창의원수부는 2월 27일 양주군 덕도리 전투에서 일본 헌병대 3개 부대로부터 공격을 당하여 탄약을 전부 소모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인하여 3월 초순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는 해산하였다. 3월 31일 이은찬의 체포 소식을 듣자, 강기동은 4월 초순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이은찬이 사용하던 ‘창의원수부 중군장’ 칭호를 계승하여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였다.
경기도 양주군과 포천군 등 경기 동북방에서 활발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으나 경술국치 후 일본군의 ‘의병대토벌작전’을 피하여 북간도로 망명을 시도하다 1911년 2월 12일 강기동이 원산에서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은찬의 뒤를 이어 창의원수부 중군장이 된 강기동은 먼저 1909년 6월 초에 경기도 양주군에 격문을 발송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6월 경에는 경기도 양근군의 헌병대원들과 교전을 벌였고 7월에는 세 차례에 걸쳐 경기도 양주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8월 1일에는 경기도 양주군 우편전신취급소를 습격하였고, 9월 13일 퇴계원에서 헌병대와 전투하는 등 일본군과 다수의 전투를 벌였다. 9월 하순에는 일본 헌병대의 추격을 받아 양주군 화도면[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퇴각하였다가 가평군으로 이동하였다.
강기동 부대는 1909년 11월까지 일본군과 다양한 교전을 벌이면서 활약하다가 1909년 11월 중순부터 연기우의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일제는 강기동과 강기동 부대를 없애기 위해 1910년 6월부터 토벌 작전을 진행하였고 강기동은 점차 북상하였다. 이후 일제가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40일 간에 걸쳐 황해도 지역 내에서 ‘의병대토벌작전’을 벌이자, 이를 피해 북간도로 망명하려고 이동하였다. 그러나 1911년 2월 체포된 강기동은 일본군에 의하여 같은 해 4월 17일 경성부 용산면에서 총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는데, 특히 현역 군인들이 의병 운동에 투신하였다. 강기동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약을 한 의병장이며, 남양주 일대를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에서 보여 준 강기동 부대의 활약은 전체 의병 운동 중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의병장 강기동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