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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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殷瓚 聯合部隊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헌주 |
설립 시기/일시 | 1908년 6월 - 이은찬 연합부대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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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09년 3월 - 이은찬 연합부대 해산 |
성격 | 의병 부대 |
설립자 | 이은찬 |
[정의]
개항기 경기도 남양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의병 부대.
[개설]
이은찬 연합부대는 1908년 6월경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조직한 의병 부대로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라고도 불렸다.
창의원수부는 정용대 의병 부대를 우군장, 윤인순 의병 부대를 좌군장으로 삼아 연합 의병 부대로 구성하였다. 좌군과 우군은 원래 독립 부대로 활동하였고 대규모 전투 시에 상호 연합 작전을 통해 협력하였다. 그 밖에 부장과 참모, 군량장 등을 두는 등의 체계를 갖추었다.
주로 경기도 양주·포천·영평·연천·장단·마전, 강원도 춘천·철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설립 목적]
이은찬 연합부대를 비롯한 개항기의 의병은 일본제국주의 국권 침탈에 맞서 국권을 지키고자 일어났다. 특히 1905년 이후 의병들은 국권회복을 기치로 내걸었다.
[변천]
이은찬 연합부대는 1907년 12월 결성된 13도 창의대진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3도 창의대진소는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임진강 연합 의병이 결성되고 다시금 서울 진공 작전이 계획되었지만, 총대장 허위가 체포되면서 연합 의병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임진강 연합 의병이 해체된 이후 이은찬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이은찬 부대는 결성 초기인 1908년 6월경에는 주로 경기도 남양주를 비롯한 경기도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7월에 부대를 해산하고 중국 길림성으로 가려다가 다시 돌아와서 창의원수부를 결성하여 경기도 포천군과 가평군, 양주군, 양평군 등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일본군 및 일본 헌병들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1909년 3월 중순 일본군이 이은찬 연합부대에 대한 대토벌작전을 감행하면서 이은찬 부대는 해산하였고 이은찬 역시 3월 30일 체포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은찬 연합부대는 1908년 12월에 경기도 포천군 외소면에 휘하 의병들을 파견하여 일본군의 전력을 탐문한 후, 포천헌병분견소로 격문을 보냈다. 이 격문으로 일본군을 유인한 이은찬 연합부대는 경기도 가평군으로 이동하여 전투 준비를 하였다. 이은찬 연합부대와 일본군은 경기도 가평군 상면 서파동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다.
1909년 1월에는 경기도 포천군 일대의 일본군 전선을 절단하고 포천헌병분견소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그런데 계속된 전투로 인하여 군량미와 탄약이 부족하여지고 병력의 손실 또한 가속화되었다. 이은찬 연합부대는 부대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1909년 2월에는 경기도 영평군 일대에서 군자금 확보에 주력하였다. 1909년 2월 말 이은찬 연합부대는 경기도 양주군 덕도리 인근에서 고양헌병분견소와 북한산파견소 헌병들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의 협공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결국 재집결을 약속하고 윤인순 부대와 분리하여 활동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윤인순 부대와 분리 이후에 이은찬 연합부대는 1909년 3월 초에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 부근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다가 패배하여 퇴각하였고, 다시 경기도 포천군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퇴각하였다.
[의의와 평가]
13도 창의대진소의 중요 직책을 맡았던 이은찬이 13도 창의대진소 해산 이후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재건하여 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의병장 이은찬의 공로를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