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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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지석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이종록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 시대 무덤 양식.
[개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초기 철기 시대까지 존속하였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로 칭하며 한국에서도 경우에 따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혹은 대석개묘(大石蓋墓), 유럽에서는 돌멘(Dolmen) 등으로 부른다. 한반도에서 고인돌은 함경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전 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수량도 15,000기에서 20,000기 이상으로 매우 많은 수가 확인된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 유역의 평원과 낮은 구릉에 주로 조성되었으며, 넓은 평야 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에 비교적 인접한 약간 높은 지대, 혹은 해안 지대에 많은 편이다. 이러한 배치는 고인돌이 조성된 시기 생활 주거지가 주로 이러한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넓은 평야 지대는 습지가 많았던 반면 구릉 지대는 인간의 거주지로 적합한 면이 많았다. 고인돌은 수 기 내지 수십 기,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 기가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은 탁자식·기반식·개석식으로 분류되는데, 1960년대 중반까지는 탁자형으로 분류되는 형식이 주로 한강 이북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식’으로 분류하였고, 기반식은 주로 남부에 분포하여 ‘남방식’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사가 진행되면서 한강 이북에도 기반식이 다수 발견되고, 남쪽에도 탁자식이 확인됨에 따라 이러한 용어는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오늘날에는 대형 판돌 3매 혹은 4매를 ㄷ자나 ㅁ자로 짜 맞춰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놓은 형태를 ‘탁자식’, 그리고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위의 덮개돌과 그 사이에 몇 개의 고임돌을 세운 형식을 ‘기반식’ 혹은 ‘바둑판식’으로 분류하였다. 또 탁자식, 기반식으로 분류하기 어려우며 받침돌이 없는 채 지면 위에 커다란 윗돌만 올려놓은 형식이 많은 점을 보아, 이를 ‘무지석식’, 혹은 ‘개석식’이라는 제3의 형식이 추가되었다. 이외에도 고인돌의 형태 분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세 형태의 분류가 주로 사용된다.
고인돌의 기능은 일반적으로는 무덤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무덤 외에 제단, 혹은 비석과 같은 기능을 하는 묘표석(墓標石)으로 보는 견해 등 의견이 분분하다. 매장 시설을 기준으로 형식을 분류할 경우에는 매장 공간의 수에 따라 ‘단석실형’과 ‘다석실형’으로 분류하거나, 매장 공간의 형태와 축조 방법에 따라 ‘석실형’, ‘석관형’, ‘석곽형’, ‘토광형’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인돌은 외부의 표지석과는 달리 매장은 대부분 소형이어서, 성인 시신을 똑바로 눕혀 안치할 공간조차 부족한 경우도 있다. 비록 일부 탁자실 고인돌에 석실과 석관이 있기도 하지만 수가 적으며, 대부분은 소형이다. 또 시신과 함께 묻은 부장품(副葬品)도 다른 시대의 무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편으로, 주로 간석기[磨製石器]나 민무늬토기편[無文土器片]이 출토 유물의 다수를 차지하며, 청동기와 같은 유물은 한반도 남부 지역 외에는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청동기가 출토되는 고인돌들의 경우는 유물의 특성상 당시 지역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시기도 고조선의 건국 이후로 여겨진다.
고인돌을 조성한 시기의 비정에는 논란이 매우 많다. 북한 학계처럼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을 기원전 20세까지 올려 보기도 하는가 하면, 일본 학계처럼 기원전 6세기경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소멸 또한 신석기 시대 중기로 보거나 기원전 1세기까지로 추정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분포 현황]
경기도 남양주에서는 삼패리 지석묘·가운동 지석묘·지금동 지석묘·금남리 고인돌·진중리 고인돌·지둔리 고인돌·진관리 지석묘·송능리 지석묘·퇴계원면 지석묘·송촌리 지석묘 등이 보고되고 있다. 금남리 고인돌은 5기에서 6기로 보고되는 지석묘군을 형성하고 있어, 금남리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확인되는 고인돌은 대부분 남방식 고인돌이거나, 분류에 따라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무지석식]인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고인돌에서는 현재까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동검 등의 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인돌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분포 현황이나 규모로 보아, 특히 금남리 고인돌처럼 복수의 고인돌이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아 남양주 일대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거주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강 본류와 북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선사 시대 사람들의 거주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던 결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