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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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裕孫 |
영어공식명칭 | Hong Yuson |
이칭/별칭 | 여경(餘慶),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채홍병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에서 김시습과 교유하고 사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불암산에 안장되었다는 조선 전기의 문인.
[가계]
홍유손(洪裕孫)[1452~1529]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이다. 아버지는 향리(鄕吏) 홍순치(洪順致)이다.
[활동 사항]
홍유손은 1452년(단종 즉위년)에 태어났다. 성리학과 노장학(老莊學) 등에 정통하였으며 시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며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수락산(水落山)의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은거하던 김시습(金時習)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도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홍유손의 시문집 『소총유고(篠叢遺稿)』에 수록된 행장(行狀)에서는 “공은 세종(世宗)조(朝)에 태어났다[生公於英廟之世]”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장유(張維)의 평론집인 『계곡만필(谿谷漫筆)』과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서는 홍유손이 78세가 되던 1529년(중종 24)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여 출생년을 1452년(문종 2)으로 비정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 홍유손이 문장에 능한 것을 눈여겨본 남양군수(南陽郡守) 채수(蔡壽)가 향리의 역을 면하게 하여 주자 사림파(士林派)의 영수로 추앙받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들어갔다.
홍유손은 유학뿐만 아니라 도가(道家)에 관련된 소양도 갖추고 있었으며,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진 김시습·남효온(南孝溫) 등과 교류하면서 ‘청담파(淸談派)’를 형성하고 위진남북조시대의 죽림7현(竹林七賢)을 본뜬 모임을 갖는 등 일종의 ‘방외인(方外人)’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김시습과는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짓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용익(南龍翼)의 문집 『호곡집(壺谷集)』에 수록된 「간폭정기(看瀑亭記)」의 매월당(梅月堂) 구지(舊址) 관련 서술을 근거로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내원암(內院庵) 근처로 추정되는 양주(楊州) 수락산의 수락정사 등지에서 김시습이 10여 년 생활할 당시에도 홍유손은 수시로 방문하여 김시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후대 사람들에게도 주목받아 1610년(광해군 2) 한무외(韓無畏)가 저술하였다는 조선 시대 도교(道敎) 수련 계보인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서는 홍유손이 김시습으로부터 ‘천둔검법연마진결(天遁劍法鍊磨眞訣)’을 전수받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도교 수련자들을 배출하였다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홍유손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자광(柳子光)·윤필상(尹弼商)이 과거 남효온·우선언(禹善言)·조자지(趙自知)·한경기(韓景琦)·수천정(秀泉正) 이정은(李貞恩)·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 등과 함께 모여 죽림7현을 모방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제주(濟州)에 유배되어 노비가 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면서 풀려났다. 이후 1510년(중종 5)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서 진사(進士) 2등 16위로 합격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1810년(순조 10) 홍유손의 8세손인 홍술조(洪述祖)가 편집하고 간행한 홍유손의 시문집 『소총유고』가 있다.
[묘소]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홍유손 사후 홍유손의 문인인 김헌윤(金憲胤)·김홍윤(金弘胤)·윤진(尹珍)·이장길(李長吉) 등이 재원을 마련하여 양주(楊州) 불암산(佛巖山)에 홍유손을 안장하였다고 한다. 불암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과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중계동의 경계에 있는 산이나 현재 홍유손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홍유손과 깊은 우의를 맺은 인물 중 하나인 남효온은 자신의 스승과 친우들의 언행을 약술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그 사람의 문장은 칠원(漆園)[장자(莊子)의 별칭]과 같고 시구는 산곡(山谷)[송대 시인인 황정견(黃庭堅)의 호]에 견줄 만하며, 재주는 공명(孔明)[제갈량(諸葛亮)]에 비기고 행실은 만천(曼倩)[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爲人文如漆園 詩涉山谷 才挾孔明 行如曼倩]”라는 평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