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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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脩 |
이칭/별칭 | 영숙(永叔),석봉(石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채홍병 |
출생 시기/일시 | 1514년 - 한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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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37년 - 한수 식년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8월 - 한수 장원서장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한수 청주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한수 사헌부지평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한수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5년 - 한수 사헌부집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3년 - 한수 장례원판결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88년 - 한수 사망 |
거주|이주지 | 한수 거주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청주(淸州) |
대표 관직 | 사헌부집의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 거주한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한수(韓脩)[1514~1588]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석봉(石峯)이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한치인(韓致仁)의 증손자이다. 증좌승지(贈左承旨) 한세륜(韓世倫)과 남양 홍씨(南陽 洪氏)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후 출계하여 사도시정(司䆃寺正) 한종(韓宗)의 양자로 들어갔다. 첫 번째 부인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와 두 번째 부인인 가산 이씨(嘉山 李氏)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해 조카인 한희록(韓希祿)을 양자로 삼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는 내외종(內外從) 사이이다.
[활동 사항]
한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수학하였고, 율곡 이이와 남명(南冥) 조식(曹植) 등 명망 있는 유현(儒賢)들과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당대에 이름났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1586년(선조 19) 올린 상소에서 한수에 대해 “노성한 선비로서 세상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지만, 시의에 빌붙지 않았기 때문에 초야에서 시들어 죽었다[以老成宿儒 爲世所重 只爲不附時議 坐枯郊坰].”, “한수의 나이와 덕망은 서울의 선배들도 경외하는 바다[韓脩年德 乃是洛中先輩所敬畏].” 등의 서술을 남기고 있다.
한수는 1537년(중종 32)에 식년시에 합격하였으며, 공천(公薦)에 의해 별좌(別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66년(명종 21) 명종이 명망 있는 유현들을 조정에 등용할 목적으로 이조(吏曹)에 생원·진사 중에서 선비를 뽑는 6가지 덕목인 ‘경명(經明)’·‘행수(行修)’·‘순정(純正)’·‘근근(勤謹)’·‘노성(老成)’·‘온화(溫和)’의 6조(條)를 갖춘 자를 대신 및 예조와 의논하여 추천하라는 전교를 내려 조식을 비롯해 김범(金範)·남언경(南彦經)·성운(成運)·이항(李恒) 등 총 6명이 선발되었는데, 한수 또한 ‘경명’과 ‘행수’ 부문을 근거로 천거 대상에 뽑혔다. 이조에서 한수 등 6명을 6품 관직에 올리기를 청하고 명종이 이를 승인하면서 한수는 1566년 8월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에 제수되었다. 한수는 이에 명종에게 숙배하고 본인의 부족함을 거론하며 사직소를 올렸으나, 명종은 사직소를 반려한 뒤 사정전에서 지평현감(砥平縣監) 남언경·사축(司畜) 이항·언양현감(彦陽縣監) 임훈(林薰)과 함께 한수를 소견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와 학문을 닦는 방법 등을 물었다.
선조 대에 들어서면 1573년(선조 6) 3품 관직인 청주목사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574년(선조 7)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는데, 한수가 세 차례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나 선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한수에게 학문의 요점을 묻기도 하였다. 1574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고, 1575년(선조 8)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직책을 역임하였다. 이이의 일기인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따르면 1575년 8월 사간원대사간 허엽(許曄)이 좌의정 박순(朴淳)을 추고(推考)하는 문제를 놓고 정언(正言) 조원(趙瑗)과 마찰을 빚은 뒤 당시 홍문관부제학이었던 이이가 양사(兩司)를 모두 체직하고 조원만 출사시키는 결론을 내린 것이 잘못이라고 불평하자, “허(許) 태휘(太輝)[허엽의 자(字)]가 분명 실성한 것이다. 장차 죽으려는 것인가?[許太輝必失性 殆將死乎]”라고 하며 이이의 결정에 힘을 실어 주었다. 1576년(선조 9) 이이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 직전에는 남언경 등과 더불어 이이와 시사를 논하기도 하였다. 그 뒤 1583년(선조 16) 한수가 사직소를 올리자 선조가 나이 70세가 넘었으니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한직에 제수해 우대하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과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일대에 해당하는 “광주(廣州) 도미(渡迷)의 선영(先塋) 곁에 살았다[公卜居廣州渡迷先塋側]”라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으로 미루어보건대, 말년에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던 청주 한씨 문중의 선영 근처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문과 저술]
『국조인물고』에 “한수의 저술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는데, 남아 있던 시문 20여 수(首) 가량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수습하여 간행하였다[所著述 又散軼 玄石朴公世采攟拾零瑣付剞劂僅卄餘首].”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숭정 기원후 정묘년(1687) 2월 신해일 반남 박세채가 삼가 씀[崇禎紀元後丁卯二月辛亥 潘南朴世采謹書]”이라고 적힌 발문(跋文)이 수록된 한수의 문집 『석봉선생유고(石峯先生遺稿)』가 전한다.
[묘소]
한수는 1588년(선조 21)에 사망하였는데 한수의 문집인 『석봉선생유고』의 발문에 “조상의 선영 아래 장사지냈다[葬從先兆].”라는 대목이 있는 것과 『국조인물고』의 “공의 무덤도 도미(渡迷)에 있으나 황폐해진 채 관리되지 않았다[公幽宅 亦在渡迷 而荒廢不修].”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던 청주 한씨 문중의 선영에 안장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묘소의 위치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