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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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云仡 |
영어공식명칭 | Jo Unheul |
이칭/별칭 | 석간(石磵),서하옹(棲霞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332년 - 조운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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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57년 - 조운흘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363년 - 조운흘 공신 책봉 |
활동 시기/일시 | 1364년 - 조운흘 국자감직강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377년 - 조운흘 좌간의대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389년 - 조운흘 첨서밀직사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393년 - 조운흘 검교정당문학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404년 - 조운흘 사망 |
거주|이주지 | 고원강촌 - 경기도 남양주시 |
부임|활동지 | 강릉 - 강원도 강릉시 |
부임|활동지 | 계림 - 경상북도 경주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풍양(豊壤) |
대표 관직 | 서해도도관찰사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 은거하였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조운흘(趙云仡)[1332~1404]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호는 석간(石磵)·서하옹(棲霞翁)이다. 고려 태조 대에 평장사를 역임한 조맹(趙孟)의 30대손이다.
[활동 사항]
조운흘은 1332년(충숙왕 복위 1)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가 되었고, 승진을 거듭하여 합문사인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형부원외랑을 지낼 때 홍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남쪽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이등공신이 되었다. 1362년 국자직강으로 승진하였고, 전라도·서해도·양광도 3도의 안렴사가 되었다. 1374년 전법총랑을 지내고 벼슬에서 물러나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머물며 은둔하였다.
1377년(우왕 3) 좌간의대부로 다시 등용되어 왕에게 서연(書筵)의 재개를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이후 판전교시사가 되었으나 1380년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남양주 일대인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살면서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을 짓고는 원주(院主)를 자칭하였다. 1388년 전리판서로 다시 기용되었다가 밀직제학이 되었다. 당시 안렴사의 품계가 낮아 직무 수행이 어렵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사람을 도관찰출척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조운흘은 이때 서해도도관찰사로 나갔는데, 도서(島嶼) 지역의 비옥한 토지 및 소금에서 나오는 이익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5군(軍)의 장수와 8도(道)의 군관(軍官)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주고 그곳의 천호(千戶)와 백호(百戶)에게는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섬들을 식읍으로 삼게 하면 국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조운흘은 1388년(창왕 원년)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첨서밀직사사가 되었고,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으로 나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 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지만 곧 병으로 사직하고 광주 고원촌으로 돌아갔다. 이후 검교정당문학에 임명되었지만 녹봉을 받지 않았으며, 1404년(태종 4)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운흘은 고려 시대 시문 선집(選集)의 하나인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3권 1책을 편집하였다. 일반적인 선집과 달리 편자인 조운흘보다 비점을 가한 최해의 이름을 먼저 적고 있다. 권상(卷上)은 오언시(五言詩), 권중(卷中)은 칠언시(七言詩), 권하(卷下)는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수록하고 있다. 『삼한시귀감』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동문선(東文選)』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