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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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乞暇省墓 宿石室書院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장순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29년 8월 1일 - 「걸가성묘 숙석실서원」 김수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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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89년 4월 9일 - 「걸가성묘 숙석실서원」 김수항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99년 - 「걸가성묘 숙석실서원」 『문곡집』 수록 |
배경 지역 | 석실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수항 |
[정의]
조선 후기 문인 김수항이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서원을 참배하고 지은 한시.
[개설]
「걸가성묘 숙석실서원(乞暇省墓宿石室書院)」은 조선 후기 문인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었던 석실서원을 참배하고 나서 지은 한시이다.
김수항의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문곡(文谷), 자는 구지(久之)이다.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깊게 교류하여, 사림(士林)의 종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벼슬은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때 실각하여 진도(珍島)에서 사사되었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 능하여 당대의 제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전서(篆書), 해서(楷書), 초서(草書) 에 모두 능하였다. 대표적인 문집은 『문곡집(文谷集)』이며, 「걸가성묘 숙석실서원」은 1699년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이 간행한 『문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구성]
「걸가성묘 숙석실서원」의 형식은 칠언율시(七言律詩)이고, 운자(韻字)는 애(哀), 회(回), 래(來), 재(才), 최(催)이다.
[내용]
「걸가성묘 숙석실서원(乞暇省墓宿石室書院)」[말미를 얻어 성묘하고 석실서원에서 자다]
상락정주후안애(霜落汀洲候雁哀)[서리 내린 모래톱에 기러기 소리 슬픈데]
객창청형몽초회(客窓淸迥夢初回)[객창 청량하여서 꿈이 막 깨었도다]
고촌야화금대근(孤村夜火金臺近)[외로운 마을의 밤 등불에 금대산 가깝고]
백리추도두협래(百里秋濤斗峽來)[백 리의 가을 물결에 두협이 다가드네]
지승편생귀세념(地勝便生遺世念)[경치 아름다워 문득 세상 벗어날 생각 들지만]
시위환괴제삼재(時危還愧濟川才)[시절 위급하니 재상의 재주에 부끄럽네]
강호낭묘무장책(江湖廊廟無長策)[강호에서나 조정에서 좋은 계책 없는데]
세모편경백발최(歲暮偏驚白髮催)[세모에 백발이 재촉하여서 더욱 놀랍구려]
[특징]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김상헌(金尙憲)[1570~1652]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김상헌은 김수항의 할아버지이다. 석실서원은 1656년 창건되었으며, 1663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수련(首聯)에서는 서원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새소리와 서원의 냉기에 깬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함련(頷聯)에서는 서원 주변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금대산은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 있는 산이다. 두협은 경기도 양주와 광주 사이로 흐르는 두미강(斗尾江)의 기슭으로 보이며, 여기에 김수항의 형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일사정(一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경련(頸聯)에서는 복잡한 정치를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토로하고 있다. ‘제천(濟川)’은 은나라 고종(高宗)[B.C. 1250~B.C. 1192]과 관련된 고사에서 온 말이다. 고종이 부열을 재상으로 발탁하고 나서 “만약 강을 건너게 된다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고, 가뭄이 들 때면 장맛비로 삼겠다.”라고 말한 데에서 인용하였다. ‘제천’은 재상을 의미하고 있다. 미련(尾聯)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새로운 정치를 이루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것과 세월이 쏜살같이 흐르는 것에 대하여 한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걸가성묘 숙석실서원」은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자신의 무력함에 벼슬을 그만둘 것을 고민하면서도 결국 정치를 떠나지 못하는 김수항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