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979
한자 儒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경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 유교의 연원과 전개 및 현황.

[개설]

유교(儒敎)는 대략 선진(先秦) 시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를 창시자로 삼아 주대(周代)의 종법(宗法) 제도와 예악(禮樂) 문화의 구현을 지향하며 현대까지 꾸준히 축적되어 온 제반의 사회적 질서 및 종교적 전통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유교를 서구에서 기원한 ‘religion’이라는 개념의 번역어 ‘종교’라는 용어 아래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하여 학술적 영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문제 제기가 있다. 하지만 유교가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소속 한국의 대표적인 7가지 종교를 지칭하는 이른바 ’7대 종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유교가 종교에 해당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 유교가 처음 전파된 구체적인 시기는 사료상의 한계로 특정하기 어렵다. 다만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을 아우르는 양주목이라는 행정 구역이 고려 시대 3경(京) 12목(牧) 중 하나로 설정되었고, 987년(성종 6) 해당 지역에 경전에 통달한 박사(博士)를 파견하여 학생을 교육하게 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고려하면 최소한 고려 시대부터는 양주목 지역을 대상으로 유교 교육을 권장하는 국가적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의 유교 진흥에 적극적이었던 조선 시대에도 1401년(태종 1) 양주향교(楊州鄕校)를 건립하는 등 초기부터 양주목 일대의 지역 사회에 유교적 가치관을 뿌리내리는 작업이 시행되었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유교적 예악 질서가 정착된 결과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는 여러 가문의 세거지와 문중 선산이 형성되고, 서원 등의 교육 기관과 사당·기념비·정려(旌閭) 등 각종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그뿐 아니라 유교적 소양을 내면화하고 발전시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양한 인물 및 가문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 사상계의 주요 학파 중 하나로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의 한 축으로도 잘 알려진 낙론(洛論)의 거두 김창협(金昌協)[1651~1708]·김원행(金元行)[1702~1772] 및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중심으로 성장한 안동 김씨(安東 金氏) 집안과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마재마을 출신의 정약용(丁若鏞)[1762~1836] 및 나주(羅州) 정씨 집안, 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국난을 마주한 사대부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가오실 임하려(林下廬)의 이석영(李石榮)[1855~1934] 및 경주 이씨(慶州 李氏) 집안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처럼 경기도 남양주시는 유구한 유교적 전통을 축적하여 온 지역으로, 덕분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교 관련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가 1981년 양주군에서 독립하여 나온 것과 궤를 같이하여 성균관유도회 양주군지부로부터 성균관유도회 남양주군지부가 분리되었다. 이후 성균관유도회 남양주시지부로 바뀌었으며, 남양주시 지역민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유교 조직과도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남양주의 서원]

서원은 조선 시대 유교 선현(先賢)을 제향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지방 사족들에 의하여 설립된 일종의 사설 교육 기관을 지칭한다. 강학과 제향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향교(鄕校) 등과 같았지만, 공자와 제자인 성현(聖賢)을 제향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직계 조상 또는 학문적 스승을 배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원은 유교적 도덕 질서에 입각한 향촌 자치 운영 기구 역할도 수행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지방 사족들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었던 서원으로는 조선 후기 유명한 척화신(斥和臣)들이었던 김상헌(金尙憲)[1570~1652]·김상용(金尙容)[1561~1637]을 배향한 석실서원이 있다. 김상헌·김상용 형제 집안의 선산이 있었던 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에 석실서원이 건립된 것은 1656년(효종 7)이었으며 이후 숙종 대에 거듭 발생한 환국을 거치면서 김수항(金壽恒)[1629~1689]·민정중(閔鼎重)[1628~1692]·이단상(李端相)[1628~1669] 등 걸출한 노론(老論) 인사들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이를 토대로 근기(近畿) 지역 낙론계 노론 세력의 정치적·학문적 근거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후대에는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金昌集)[1648~1722]·김창협·김창흡(金昌翕)[1653~1722] 형제를 비롯하여 김원행·김이안(金履安)[1722~1791]·김조순(金祖淳)[1765~1832] 등 안동 김씨 출신 인물들이 다수 배향되면서 일종의 문중 서원 성격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석실서원도 훼철되어 터만 남아 있다.

[남양주의 사당과 재실]

사당과 재실은 성현과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치르며 혈맥·학맥 등으로 상호 연결되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유교적 의례 공간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사우(祠宇)·향사(鄕祠)·이사(里祠)·영당(影堂)·별묘(別廟) 등의 다양한 이칭 별칭으로 나타난다. 유교의 상장례는 사망한 인물의 시신을 의례에 따라 무덤에 안장한 후 신주를 제작하여 사당으로 모셔와 제향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조선 시대에 다수의 선영과 집성촌 등이 조성되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의 특징을 고려한다면 사당 또한 다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전란이나 개발 등의 사유로 철거되거나 이전된 경우가 많아 건립 당시의 위치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 예로 태조 이성계의 동생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1348~1408]의 사당은 19세기 무렵 건립되었으나 1950년대 6·25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사당은 1958년 중건되어 1970년대에 보수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도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사당을 신축 및 개수·보수하는 움직임이 관찰되는데, 그만큼 유교적 전통을 보존 및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경내에 현존하는 주요 사당 및 재실로는 전술한 의안대군 이화 사당을 비롯해 ‘신재묘(信齋廟)’라는 현판을 내건 청주(淸州) 한씨 집안의 남양주 한상경(韓尙敬) 사당, ‘양효재(養孝齋)’라는 현판을 내건 기계(杞溪) 유씨 집안의 사당, ‘영모재(永慕齋)’라는 현판을 내건 양주(楊州) 조씨 집안의 조말생(趙末生)의 사당, ‘묵수재(默守齋)’라는 현판을 내건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의 사당, ‘문도사(文度祠)’라는 현판을 내건 정약용의 사당 등이 있다.

[남양주의 능묘]

능묘는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지칭하는 ‘능(陵)’과 여타 왕족·사대부·일반 서민의 무덤을 지칭하는 ‘묘(墓)’를 지칭하나 개념상으로는 왕의 사친(私親) 및 왕세자·왕세자빈·후궁 신분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무덤을 지칭하는 ‘원(園)’까지 포괄한다. 유교 경전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례가 사당을 중심으로 진행되도록 구성되어 있었고 무덤은 조상의 시신이 안장되는 장소라는 의미만 부여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조선 시대 이전까지는 사당이라는 유교적 공간에서는 유교적 제사가 이루어지고 능묘에서는 불교 또는 도교적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 시대부터 왕실이 능묘를 유교적 제향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재설정하면서 능묘 역시 유교 의례의 대상으로 포섭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가 풍수지리적 요건은 물론,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근거리에 있었으며 육로와 한강을 통한 수로 양방향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편의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남양주 지역에 다수의 왕실 능묘와 사대부 집안의 선영 및 개별 묘소를 조성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소재한 주요 왕실 능묘로는 세조(世祖)·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묘인 남양주 광릉(光陵)을 비롯하여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남양주 사릉(思陵), 고종(高宗)·명성황후(明成皇后)의 남양주 홍릉(洪陵), 순종(純宗)과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남양주 유릉(裕陵)을 비롯하여 인빈(仁嬪) 김씨의 남양주 순강원(順康園), 수빈(綏嬪) 박씨의 남양주 휘경원(徽慶園),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흥원(興園)(흥선대원왕)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광해군(光海君)·임해군(臨海君)의 묘, 그리고 공빈(恭嬪) 김씨의 남양주 성묘(成墓)안빈(安嬪) 이씨남양주 안빈묘, 영빈 김씨(寧嬪 金氏)남양주 영빈묘 등이 있다.

또한 주요 가문 및 시조, 입향조로 능성(綾城) 구씨 구수영(具壽永)[1456~1523]·안동 김씨 김번(金璠)[1479~1544]·청풍(淸風) 김씨 김식(金湜)[1482~1520]·의령(宜寧) 남씨 남을번(南乙蕃)[1320~1395]·사천(泗川) 목씨 목세칭(睦世秤)[1487~?]·여흥(驪興) 민씨 민제인(閔齊仁)[1493~1549]·순천(順天) 박씨 박원종(朴元宗)[1467~1510]·원주(原州) 변씨 변안렬(邊安烈)[1334~1390]·청송(靑松) 심씨 심선(沈璿)[?~1465]·기계 유씨 유강(兪絳)[1510~1570]·해주(海州) 정씨 정미수(鄭眉壽)[1456~1512]·양주 조씨 조말생(趙末生)[1370~1447]·풍양(豊壤) 조씨 조맹(趙孟)·경주(慶州) 최씨 최청(崔淸)[1344~1414]·청주 한씨 한상경(韓尙敬)[1360~1423] 등의 선영과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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