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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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遺物 散布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이종록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선사 시대부터 역사 시대까지 주민들의 생활상과 관련된 유물들이 일정 범위에 산포하고 있는 장소.
[개설]
유물 산포지(遺物 散布地)는 무덤이나 집터와 같은 특정 유적이 아닌, 토기 조각이나 석기류 등의 유물이 다수 수습되어 어떠한 유구 및 유적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이들 유물은 대부분 지표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지만, 이후 시굴 조사 및 발굴 조사를 거친 후 정확한 범위에서 특정 유적의 존재 유무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지표에서 수습되는 유물만을 확인할 수 있는 특성상 외부 유입 유물이나 여러 시기의 유물이 혼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해당 유물 산포지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은 정밀 조사를 거친 후에 이루어 질 수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의 유물 산포지는 지금동 유물 산포지, 능내리 유물 산포지, 금남리 유물 산포지, 도곡동 토기 산포지, 이패리 유물 산포지, 월곡리 유물 산포지, 연평리 유물 산포지, 퇴계원 유물 산포지 등이 보고되고 있다. 이 유물 산포지들은 특정 시기의 유물만이 수습되는 경우도 있지만, 금남리 유물 산포지처럼 선사 시대에서부터 역사 시대 전반에 걸친 장기간의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도 많다.
[분포 현황과 출토 유물]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 산포지는 비교적 늦게 확인되었는데, 2000년에서 2001년 사이 경기도 남양주 호평동의 택지 개발 지구 내 기와 가마터 조사 과정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수습된 사례가 있다. 이후 경기도 남양주 호평동 일대에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대규모 후기 구석기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가운동[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이패동·수석동 일원의 택지 개발 사업 지구 내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수습된 유물 산포지 11개소가 보고되었다.
이와는 달리 신석기시대 유물 산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다수 보고되어 왔는데, 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수석동 유물 산포지, 지금동 유물 산포지, 진중리 유물 산포지, 퇴계원 유물 산포지, 금남리 A구역 유물 산포지가 있다. 이 중 수석동 유물 산포지에서는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조각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지금동 유물 산포지와 퇴계원 유물 산포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금남리 A구역 유물 산포지는 신석기 시대부터 역사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석기와 토기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들 유물 산포지는 유물 산포지 지역 일대에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자료들이다.
또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는 유물 산포지로는 지금동 유물 산포지, 능내리 유물 산포지 등이 있다. 이 중 지금동 유물 산포지는 일제 강점기에 8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민무늬토기[무문토기] 조각에서부터 반달돌칼[반월형석도], 간돌검[마제석검] 조각, 어망추, 간돌화살촉[마제석촉] 등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 능내리 유물 산포지에서도 몇 개의 어망추와 연석봉, 민무늬토기 조각과 눌러찍은무늬토기[타날문토기]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들 유물 산포지의 현황과 유사한 입지 조건을 지닌 다른 지역의 현황을 감안하여 대규모 선사 유적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금남리 A구역 유물 산포지에서는 청동기 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는 토기들이 확인되었고, 연평리 유물 산포지에서도 민무늬토기 조각과 석기가 출토되었다.
오랜 기간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 산포지는 보고되지 않고 그 존재 가능성만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구석기 시대 유물이 수습되고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왔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도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는 여러 지석묘와 더불어 주민이 거주한 증거가 여럿 나타나고 있다. 비록 청동기 시대 유물 산포지의 경우 아직 세형동검과 같은 청동기는 거의 수습되지 않았지만, 청동기 시대의 토기와 기타 유물군의 존재를 감안하면 청동기 시대에도 여전히 다수의 취락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유물 산포지의 많은 수가 여전히 조사가 미진하여, 향후 이들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