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97 |
---|---|
한자 | 桂勳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월산리 606-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지훈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 계훈제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43년 - 계훈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계훈제 강제 징용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계훈제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계훈제 환국한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계훈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안' 반대 운동 주도 |
수학 시기/일시 | 1948년 - 계훈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계훈제 한국교원노조연합회 결성 주도 및 서울 지역 중앙 위원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 계훈제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 계훈제 『사상계』 편집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69년 - 계훈제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상임 운영 위원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 계훈제 『씨알의 소리』 편집 위원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75년 - 계훈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82년 - 계훈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85년 - 계훈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87년 - 계훈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89년 - 계훈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 고문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89년 - 계훈제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 의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91년 - 계훈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 결성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99년 - 계훈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21년 - 계훈제 국민훈장 모란장 추서 |
출생지 | 계훈제 출생지 - 북한 평안북도 동림군 부황리 |
학교|수학지 | 서울대학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묘소 | 모란공원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월산리 606-1] |
성격 | 민주화 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 의장|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민주화 운동가.
[가계]
계훈제(桂勳梯)[1921~1999]의 아버지는 계봉집(桂鳳集), 어머니 이형저(李亨姐)이다. 1921년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부황동에서 오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계훈제는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944년 학도병 지원을 거부하다 붙잡혀 징용에 끌려갔다. 강제 징용을 당한 계훈제는 징용 현장에서 조선민족해방협동당 조직원과 접촉하여 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환국한 임시정부에서 선전부 활동을 하였으며, 1946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안’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49년에 폐결핵과 늑막염 등을 얻어 투병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950년대 말 다시 사회 운동 일선으로 복귀하였다.
1960년 한국교원노조연합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서울 지역 중앙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에는 함석헌·장준하 등과 함께 자유언론수호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사상계』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상임 운영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70년에는 『씨알의 소리』 편집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5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1982년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투옥되었다.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으로 활동하였고, 1987년 6월 항쟁 당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89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 고문·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였고, 1991년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 결성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99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묘소]
계훈제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 민족·민주 열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계훈제의 공훈을 기려 202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