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67
한자 朴泳孝
영어공식명칭 Park Yeong-hyo
이칭/별칭 무량(無量),자순(子純),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월산리 606-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양진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 6월 12일연표보기 - 박영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박영효 수신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박영효 『사화기략』 저술
활동 시기/일시 1884년 - 박영효 갑신정변 주도
활동 시기/일시 1884년 - 박영효 일본 망명
활동 시기/일시 1888년 - 박영효 메이지학원 영어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888년 - 박영효 건백서 저술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박영효 귀국, 갑오개혁 참여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박영효 일본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박영효 귀국, 제주도 유배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박영효 후작 작위 수작
활동 시기/일시 1911년 4월 - 박영효 조선귀족회 조직, 회장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0년 4월 - 박영효 『동아일보』 초대 사장
활동 시기/일시 1925년 7월 20일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고문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2년 2월 - 박영효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39년 9월 21일연표보기 - 박영효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 박영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결정
출생지 경기도 수원부 - 경기도 수원시
유배|이배지 제주도 - 제주특별자치도
묘소|단소 박영효 묘소 -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다대리
묘소|단소 모란공원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월산리 606-1]지도보기
성격 관료
성별 남성
본관 반남
대표 관직 내부대신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묘가 있는 개항기 관료.

[가계]

박영효(朴泳孝)[1861~1939]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오창공(梧窓公)파 11세손이다. 초명은 박무량(朴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필명은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일본 망명 때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흥덕현감, 공조참의, 도총부도총관, 공조판서를 지낸 박원양(朴元陽)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첫째 형 박영교(朴泳敎)는 홍문관수찬을 지냈으나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피살되었다. 1872년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해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영혜옹주는 가례식을 올린 지 4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후 부마 제도의 관습에 따라 재혼을 하지 않았고, 소실 범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1861년 6월 12일 경기도 수원부에서 태어났다. 1882년 12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며, 1883년 3월 광주부유수에 임명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일본을 방문해 수신사로 활동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해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4년 귀국해 갑오개혁에 참여했다. 1895년 역모 혐의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7년 귀국해 약 1년 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 작위를 받았고, 1911년 4월 조선귀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0년 4월 창간된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을 지냈으며, 1925년 7월 20일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1932년 2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어 1939년 9월 21일 사망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활동을 비롯해 박영효가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한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 반민족 행위로 결정되었다.

[학문과 저술]

어린 시절에 전통 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의 지도를 받아 국제 정세와 선진 지식을 익혔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1888년 도쿄 소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영어과를 졸업했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와 일본 견문록인 『사화기략(使和記略)』을 저술했으며, 일본에 망명해 있던 1888년 고종에게 올리는 상소문 형식의 건백서(建白書)를 저술해 국가 개혁 구상을 피력했다.

[묘소]

1939년 사망 직후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다대리[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묻혔으나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이장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1915년 11월 다이쇼천황(大正天皇)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 1924년 2월 훈1등 서보장(瑞宝章), 1928년 11월 쇼와천황(昭和天皇)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 1935년 10월 시정(始政) 25주년 기념 표창, 1939년 9월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34년 3월 만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장(建國功勞章)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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