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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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牧邑誌 |
영어공식명칭 | Yangju-mok Eupji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한신 |
[정의]
1871년 경기감영에서 지금의 남양주 지역을 포함하는 양주목의 지형과 토산물 등을 기록한 지리지.
[개설]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는 1871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을 포함한 양주의 지역 사정을 상세히 기록한 지리지이다. 사회·경제 부문뿐 아니라 자연·교통·군사·인물·제영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
경기감영(京畿監營)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찬/간행 경위]
『양주목읍지』는 경기도 35개 군의 읍지를 합편한 6책의 필사본인 『경기읍지(京畿邑誌)』의 4책에 들어 있다. 일부 읍지에 ‘동치 10년(同治十年)’으로 서명되어 있어 1871년(고종 8)에 제책된 것으로 추정한다.
[형태/서지]
『양주목읍지』는 필사본 형태이며, 가로 20.1㎝, 세로 30㎝이다. 원본은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소마노우치초[杣之内町] 덴리대학교[天理大学校]에 소장되어 있으며, 필사본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양주목읍지』는 개항기 제작된 양주목(楊州牧) 읍지(邑誌)의 영인본이다. 『양주목읍지』가 합편된 『경기읍지』는 전반적인 체제를 1757~1765년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나 1842~1843년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의 편찬 체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중 『양주목읍지』의 구성은 도(圖)·지(誌)·사례(事例)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卷頭)에는 지도가 1면이 있고, 본문은 22면의 분량이다. 본문 항목은 건치연혁(建置沿革), 성씨(姓氏), 산천(山川), 제언(堤堰), 토산(土産), 봉수(烽燧), 궁전(宮殿), 학교(學校), 서원(書院), 역원(譯院), 발참(撥站), 목장(牧場), 면리(面里), 불우(佛宇), 사묘(四廟), 능묘(陵墓), 고적(古蹟), 명환(名宦), 인물(人物), 제영(題詠), 진공(進貢), 장시(場市), 교량(橋梁), 민호(民戶), 전부(田賦), 군액(軍額), 조적(糶糴), 공해(公廨), 관방(關防), 형승(形勝)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사례’에는 육방의 관할 업무와 재정 상황 등을 적어 놓았다.
[의의와 평가]
『양주목읍지』가 편찬된 개항기는 고종(高宗)[1852~1919] 즉위를 전후로 하여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壬戌民亂)의 발생과, 일본과 서구 세력의 접근에 대처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은 1864년(고종 1)을 기점으로 고종의 섭정직을 수행하며 내수외양(內修外養)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여야 하였다. 경기도는 당시 조정의 기획과 정책이 우선적, 모범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곳이었기에, 당대 인문, 지리의 기초 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경기지』가 작성되었다. 『경기지』를 구성하는 지역 정보 중 하나로서 『양주목읍지』가 작성되었다. 현재의 남양주시 지역을 포함하는 양주에 세거하는 사족(士族), 부세(賦稅), 북한강(北漢江)과 수운, 주요 생산물과 평균적인 수량은 정책 입안 및 평가자들에게 재정, 군사 분야 등에서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