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91
한자 淸風金氏文毅公派墓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경강로399번길 24[삼패동 173-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82년 - 김식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20년 - 김식 사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80년 7월 14일 - 김육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16년 11월 19일 - 김좌명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58년 9월 4일 - 김육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71년 3월 9일 - 김좌명 사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99년 - 김성응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722년 2월 29일 - 김시묵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64년 - 김성응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72년 7월 29일 - 김시묵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9월 17일연표보기 -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경기도 기념물 제17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경기도 기념물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 경기도 남양주시 경강로399번길 24[삼패동 173-3]지도보기
성격 묘역
관련 인물 김식|김육|김좌명|김성응|김시묵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는 조선 후기 청풍 김씨의 묘역.

[개설]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風金氏文毅公派墓域)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1482~1520]과 자손들인 김육(金堉)[1580~1658], 김좌명(金佐明)[1616~1671], 김성응(金聖應)[1699~1764], 김시묵(金時默)[1722~1772]의 묘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김식은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는데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며, 바로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지만 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유배되었다. 이후 절도(絶島)로 이배(移配)된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에 숨었다가 자결하였다. 명종 때 복관되고,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김육김식의 4대손이며, 벼슬은 영의정을 지내고,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주장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유원총보(類苑叢寶)』 및 백성을 삶을 위한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辟瘟方)』,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지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좌명김육의 아들이며,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조카이며 아버지의 대동법 시행을 지속하고, 이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냈다. 특히 글씨를 잘 써서 다수의 금석문이 전하고 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성응은 김좌명의 동생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증손이다. 김성응은 무관(武官)으로 여러 곳의 절도사, 총융사, 어영대장,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김시묵은 김성응의 아들이며, 딸이 정조(正祖)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김시묵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으며, 딸이 세손빈(世孫嬪)이 되자 병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사망 후 1776년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 영의정에 증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은 2001년 9월 17일 경기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173-3번지에 있다.

[변천]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은 16세기 김식의 묘소가 조성되면서 19세기까지 후손들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형태]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김식 묘는 부인 전주 이씨와 쌍분이며, 봉분 앞에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건립되어 있다. 김육 묘는 부인 파평 윤씨와 합장 단분이며, 곡장 안에 봉분,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건립되어 있다. 김좌명 묘는 단분으로 부인 평산 신씨와 합장되었으며, 봉분 앞에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건립되어 있다. 김성응 묘는 곡장 내에 단분이며, 부인 남양 홍씨와 합장되었다. 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있으며, 왼편 문인석은 총탄을 맞아 반파되었다. 김시묵 묘는 의춘 부부인 의령 남씨, 당성 부부인 남양 홍씨와 합장 단분이며, 봉분 앞에 혼유석, 상석, 왼편에 묘표, 망주석, 문인석이 있다.

[금석문]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의 금석문은 다음과 같다. 김식 묘표는 원수방부(圓首方趺) 형태로 1753년 건립하였다. 앞면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이 글씨를 쓰고, 음기(陰記)는 김좌명이 썼으며, 김상묵(金尙黙)[1726~?]이 추기(追記)하였다.

김식 신도비는 이수방부(螭首方趺) 형태로 1662년 건립하였으며 조경(趙絅)[1586~1669]이 글을 짓고, 김좌명이 글씨와 전자(篆字)를 썼다.

김육 묘표는 원수방부 형태로 1659년 건립되었으며 김좌명이 글을 짓고 썼다. 김육 신도비는 이수방부 형태로 1664년 건립되었으며,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글을 짓고 김좌명이 썼다.

김좌명 묘표는 원수방부 형태로 1679년 건립되었으며, 김석주(金錫胄)[1634~1684]가 글을 지었다. 김좌명 신도비는 이수방부 형태로 1679년 건립되었으며,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 글을 짓고,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 전자를 쓰고, 외손 조정서가 비문의 글씨를 썼다.

김성응 묘갈은 이수방부 형태로 1766년 건립되었으며, 앞면은 소식(蘇軾)[1037~1101]의 글씨를 집자(集字)하고, 음기(陰記)는 송명흠(宋明欽)[1705~1768]이 짓고 아들 김지묵(金持默)[1725~1799]이 썼다. 김성응 신도비는 개석방부(蓋石方趺) 형태로 1796년 건립되었으며,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글을 짓고, 아들 김지묵이 썼다.

김시묵 묘표는 이수방부 형태로 1773년 건립되었으며, 앞면은 소식의 글씨를 집자하고, 음기는 권진응(權震應)[1711~1775]이 지었다. 동생 김지묵이 썼으며, 김지묵은 1792년 추기(追記)도 썼다.

[의의와 평가]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은 매우 우수한 석물이 남아 있는 곳으로 김식 신도비, 김육 신도비, 김좌명 신도비, 김성응 묘갈, 김시묵 묘표 등이 있다. 김성응과 김시묵의 묘 문인석은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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