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85
한자 南楊州 寧嬪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69년 - 영빈 김씨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35년 - 영빈 김씨 사망
조성 시기/일시 1735년연표보기 - 남양주 영빈묘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10월 25일연표보기 - 남양주 영빈묘 사적 제36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양주 영빈묘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사적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남양주 영빈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지도보기
성격
양식 개석방부[묘표]
관련 인물 영빈 김씨|숙종|영조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있는 조선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묘.

[개설]

남양주 영빈묘(南楊州寧嬪墓)는 조선 제19대 숙종(肅宗)의 후궁 영빈 김씨(寧嬪 金氏)[1669~1735]의 묘이다. 영빈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성천부사 김창국(金昌國)이고, 할아버지는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다. 영빈의 간택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김수증의 동생이다. 1686년 숙종은 후사가 없자 빈어(嬪御) 간택을 지시하여 영빈 김씨는 삼간택을 거쳐 숙의에 봉해지고 입궐하였으며, 소의(昭儀), 귀인(貴人)으로 봉해졌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김수항이 사사(賜死)되었으며, 영빈 김씨김수항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폐출(廢黜)되어 본가에서 살게 되었다.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도 폐위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와 함께 복위되었으며, 1702년 영빈으로 올랐다. 숙종 승하 후 영빈은 궁에서 나가 살았으며, 1735년 사망하여 양주(楊州) 풍양(豊壤) 병향(丙向)의 언덕[현 진접읍 장현리]에 예장되었다.

영조(英祖)는 “내가 어렸을 때 항상 어머니라고 일컬었는데”라고 술회하였는데, 영빈 김씨를 어머니처럼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조는 영빈 김씨의 상례에 매우 관심을 갖고 특별히 숙종의 후궁 명빈(䄙嬪) 상례에 준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상례 비용으로 500냥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묘소 조성 이후에 영조는 영빈묘 주변 민전(民田)을 구입하여 영빈의 묘위전(墓位田)[묘소에 사용되는 비용을 마련하는 밭]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치제하였다. 남양주 영빈묘는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남양주 영빈묘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번지에 있다.

[형태]

남양주 영빈묘는 곡장(曲墻)으로 봉분을 두르고 있으며, 봉분 하단에는 원형의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묘표(墓表),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묘표 서쪽에는 주준석(酒樽石)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있으며,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남양주 영빈묘 묘표는 1737년 건립되었으며 개석방부(蓋石方趺) 형태이다. 지붕돌과 방부는 화강암, 비신은 오석(烏石)을 사용하였다.

[금석문]

남양주 영빈묘의 묘표 앞면에는 예서(隸書)로 ‘유명조선국 영빈안동김씨지묘(有明朝鮮國 寧嬪安東金氏之墓)’라고 새겼으며, 나머지 3면에 영의정 이의현(李宜顯)[1669~1745]이 글을 짓고, 행서(行書)로 썼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영빈묘의 석물은 18세기 전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다. 문인석은 진종(眞宗) 영릉(永陵)[1728]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온릉(溫陵)[1739] 사이의 양식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묘표, 혼유석과 상석 하단에는 별도의 지대석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석물이 안정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장치이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으로 본가 안동 김씨와 영조의 관심과 지원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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