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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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楊州 成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12-8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민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공빈 김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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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577년 - 공빈 김씨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577년 - 남양주 성묘 조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10년 - 남양주 성묘를 성릉으로 추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23년 - 남양주 성묘로 환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1년 10월 25일 - 남양주 성묘 사적 제365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남양주 성묘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사적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남양주 성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12-8 |
성격 | 묘 |
관련 인물 | 공빈 김씨|선조|광해군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조선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묘.
[개설]
남양주 성묘(南楊州 成墓)는 조선 제14대 선조(宣祖)의 후궁 공빈 김씨(恭嬪 金氏)[1553~1577]의 묘이다. 공빈 김씨는 본관이 김해(金海)이며, 아버지는 사포(司圃) 김희철(金希哲)[?~1592]이다. 공빈은 1571년 궁인(宮人)으로 입궐하여 선조의 승은을 입은 뒤 소용(昭容)[정3품], 숙의(淑儀)[종2품]로 봉해졌을 때 임해군(臨海君)을 낳아 귀인(貴人)[종1품]에 봉해졌다. 이후 광해군(光海君)을 낳고, 1577년 봄 빈(嬪)[정1품]에 책봉되었으나 5월 사망하였다. 공빈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셋째가 광해군이다. 첫째 임해군과 광해군만 장성하고 다른 아이들은 어려서 죽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공빈 김씨는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追尊)되고 묘소는 성릉(成陵)으로 추봉(追封)되었다. 특히 광해군은 1613년 명(明)에 추봉을 요청하여 1615년 선조의 비(妃)로 추봉되자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였다. 그러나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공빈 성묘’로 환원되었다. 남양주 성묘는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으나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남양주 성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12-8번지에 있다.
[변천]
남양주 성묘는 1577년 공빈 김씨가 사망하자 양주(楊州) 적석동(積石洞)[현 진건읍 송능리]에 조성되었다. 고려의 조맹(趙孟) 묘소가 있던 곳으로 조맹은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시조이다. 선조는 공빈의 선조가 조씨의 외손이니 그대로 두고 장사하라고 하여 조맹의 묘 뒤편에 남양주 성묘가 조성되었다. 광해군은 1610년 공빈을 ‘공성왕후’, 묘를 ‘성릉’으로 올렸으며, 묘를 능으로 추봉하였다. 그래서 봉분의 규모를 크게 하고, 석양(石羊), 석호(石虎), 석인상(石人像) 등을 역대 왕릉의 규모를 참고하여 제작하고, 정자각(丁字閣) 등을 건립하였다. 이때 조맹의 묘소는 봉분을 깎아 평평하게 하였다. 성릉 봉릉은 1611년 완료되었으며, 1618년 지석(誌石)을 새로 제작하여 매안(埋安)하는 것으로 최종 마무리되었다.
1623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자 공성왕후의 고명(誥命)·면복(冕服)·책보(冊寶)·의장(儀仗) 등의 물건은 종묘에 고유한 다음 모두 불태워 없애 버리고, 성릉을 다시 남양주 성묘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1630년 조맹의 후손 조수이(趙守彝) 등이 상소하여 조맹 묘소의 봉분을 다시 만드는 것을 청하자 인조는 남양주 성묘에서 법도에 어긋나는 석물들을 헐도록 명하였다.
[형태]
남양주 성묘는 왕릉에 준하는 체제로 조성하였는데 12각의 일반적인 왕릉 병풍석(屛風石) 대신 원형의 호석(護石)과 난간석이 봉분을 두르고 있다. 봉분과 곡장(曲墻) 사이에는 석양, 석호가 있으며,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가 건립되어 있다. 장명등은 3.1m, 문인석은 2.5m, 무인석은 2.6m로 규모가 크다.
[금석문]
남양주 성묘에는 노출된 금석문이 없으나 1618년 지석을 제작하여 매납하였다. 이때 사용한 석재는 충주(忠州)에서 가져온 것이며, 대제학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글을 지었다. 이때 과거에 제작한 묘지석은 오자(誤字) 4자를 고쳐 새겨 함께 묻었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성묘는 후궁 묘로 조성되었다가 왕후릉으로 전면 개수되고, ‘성릉’에서 ‘성묘’로 강등되었으나 다행히 왕후릉의 석물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석물의 체제는 왕릉에 맞추었으며, 12각의 병풍석 대신 원형 호석을 쓴 것이 특징적이다. 더불어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이 매우 장대하고, 세부 장식이 섬세한 작품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