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이상촌건설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16
한자 奉安理想村建設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태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3년연표보기 - 봉안이상촌건설운동 봉안이상촌 건설
발생|시작 장소 봉안이상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봉안이상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지도보기

[정의]

1935년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 실력 양성 운동을 표방하며 추진되었던 이상촌 건설 운동.

[개설]

1935년 일가(一家) 김용기(金容基)가 고향인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에 자강적 국권 회복과 농촌 운동으로 실력을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이상촌을 만들었다.

[역사적 배경]

1930년대 일제는 만주를 비롯하여 중국 대륙으로의 침략을 위해 한국과 해외의 이상촌 운동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경과]

임광명의 연구에 따르면 김용기는 ‘농군이 되라’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받고 안창호와 이승훈 등의 이상촌을 본받아 농촌 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하는 이상촌을 건설하기로 결심하였다. 김용기는 한국의 인구 중 80% 이상이 농민이었으므로 농민들이 먼저 개화되어야 한국이 빨리 독립할 수 있다는 것과 모범적인 농촌 및 농민이 되어 배고픈 이 나라 국민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다.

봉안이상촌은 김용기의 가족과 동지 10세대로 구성되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협동조합·소비조합·공제 상호 조합을 운영하였으며, 주택 및 농사 개량·식생활 및 의생활 개선·보건 의료 의식 전파·오락 및 교육 보급 등에 앞장섰다.

또한 봉안이상촌이 이상촌 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또한 추진되었다. 봉안이상촌은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 외에도 창씨개명 반대, 공출(供出) 반대 운동, 독립운동가의 보호와 연락 업무, 해방 전 농민동맹의 결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이상촌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애국지사와 학병 징집 거부자 등이 은신을 위해 찾아왔다. 김용기는 고구마 창고와 기도굴 등에 숨겨 주었고, 항일 투사 전사옥에게는 미치광이 흉내를 내도록 가르쳐 보호하였다.

[결과]

해방 후 봉안이상촌은 “먹을 것을 주자”라는 기치 아래 농민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5번에 걸쳐서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3번에 걸쳐 이상촌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면서 봉안이상촌이 파괴되었고, 이후 김용기는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일대를 중심으로 황무지 개척 사업을 계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동걸에 따르면 “농민이자 한 사람의 농민 운동가로서, 그리고 지역의 교육 지도자로서 그의 삶의 원형이자 모태가 되었던 것은 그의 고향에서 이룩한 봉안이상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봉안이상촌은 일제 치하에서 실시된 이상촌 운동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이석재는 김용기의 봉안이상촌은 비록 그 규모는 작았지만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 농촌 운동의 맥을 잇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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