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04 |
---|---|
한자 | 奉安驛 |
영어공식명칭 | Bongan-y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평구도 소속의 역.
[개설]
봉안역(奉安驛)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 인근에 있었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의 육로 교통로를 담당한 기관이다. 조선 시대 지금의 남양주의 역제는 고려 시대의 제도에 유래를 두고 있다. 봉안역은 고려 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에 소속된 30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광주목에 위치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세조 대에 광주 소속이었으며, 성종 대에 역제의 정비가 완료되면서 양주의 관할이 되었다. 개항 이후 지방제도를 재편하던 갑오개혁기에 역제가 중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 조에 의하면, 남경이 위치하던 평구도에 속한 30개의 속역 중에 하나였다. 한양의 흥인문을 출발하여 망우리를 지나 충청도로 연결되던 육로를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관련 기록]
『세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덕풍역과 같이 광주에 소속되었으며, 경기좌도수참전운판관(京畿左道道水站轉運判官) 겸 정역찰방(程驛察訪)이 관할하였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의하면 일본의 사신들이 도성으로 가던 중 숙박하던 역이었다. 이식의 『택당집(澤堂集)』에 의하면, 광해군 대에 이이첨을 공박한 임숙영이 8년 이상 숨어 지내던 곳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의하면, 봉안역에는 황단(黃丹)이 생산되었으며 청기와를 굽는 데 황단을 넣어 약칠을 하면 기와 빛깔이 빛난다고 하여 고려 시대에는 관원을 두어 채취하였다.
[내용]
양주의 평구역과 양근의 오빈역을 연결하는 역로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며, 현재에도 동일한 지점에 봉안대교가 기능을 계승하고 있다. 한강 유통망의 요충지로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마점진이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 건너편에는 양근 관할이던 사옹원의 분원이 소재하고 있었다. 평구역과의 사이에는 삼국 시대부터 관방처로 삼았던 두미진이 있다. 오빈역 방향에는 북한강이 있으며, 강 건너에는 용진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 조에 따르면, 봉안역에는 노비 9명과 역마 13필이 배속되었다. 1496년(연산군 2)에는 봉안역에 소속된 노비를 내수사(內需司)로 이속하도록 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1496년 다시 내수사에 속한 비자(婢子) 20여 명을 봉안역으로 환원하였다. 1629년(인조 7) 봉안역의 전답 1결을 정숙옹주 집에 내려주어 제사 비용에 충당할 전답으로 하게 하였다.
[변천]
1896년(고종 33) 1월의 칙령 제9호인 「각 역의 찰방과 역속의 폐지에 관한 안건」에 따라 공식적으로 봉안역의 기능이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