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어머니들, 남양주에 잠들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013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채용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안장된 광해군과 어머니들.

[개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조선의 제15대 광해군(光海君)[1575~1641]이 잠들어 있다. 어려서 생모를 잃은 광해군은 사실상 인빈 김씨(仁嬪 金氏)가 길렀다고 한다. 아버지 선조의 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와의 복잡한 관계는 광해군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흥미롭게도 광해군은 사후 친어머니 공빈 김씨(恭嬪 金氏)는 물론 길러 준 인빈 김씨와 함께 남양주에 잠들어 있다.

[아버지의 여인들, 그리고 광해군]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宣祖)는 조선 제14대 왕이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나 조선 왕조 최초로 방계(傍系)에서 즉위한 왕이었다. 친아버지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된 이초(李岧)이며, 친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에 봉해진 하동 정씨(河東 鄭氏)이다.

선조의 부인은 모두 10명으로 왕비가 두 명, 후궁은 8명이다. 선조는 초비(初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반남 박씨(潘南 朴氏)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계비 인목왕후 연안 김씨(延安 金氏)를 맞아들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얻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여러 후궁들에게서 여러 자녀를 낳은 바 있다. 선조가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순빈 김씨(順嬪 金氏), 정빈 민씨(靜嬪 閔氏) 등 8명 후궁에게서 얻은 자녀는 13남 10녀였다. 특히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함께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선조가 낳은 자녀의 생년순으로는 두 번째 자식이었다. 이후 선조의 자녀는 주로 인빈 김씨와 정빈 민씨 등의 소생이었다. 인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仁祖)는 인빈 소생의 왕자이었던 정원군(定遠君)의 세 아들 가운데 맏이였다. 후궁 순빈 김씨는 슬하에 순화군(順和君)을 두었고, 정빈 민씨는 인성군(仁城君) 등 2남 3녀를 낳았다. 후궁 정빈 홍씨(貞嬪 洪氏)는 경창군(慶昌君) 등 1남 1녀를 낳았고, 온빈 한씨(溫嬪 韓氏)는 흥안군(興安君) 등 3남 1녀를 낳았다. 이 외에도 귀인 정씨(貴人 鄭氏)와 숙의 정씨(淑儀 鄭氏) 등 두 후궁이 있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모두 14남 11녀에 이르는 자녀를 얻었다.

[이른 친어머니의 죽음, 길러준 어머니 인빈 김씨]

광해군의 친어머니 공빈 김씨는 본관이 김해(金海)로 아버지는 사포(司圃) 김희철(金希哲)이었다. 1553년(명종 8) 태어나 1572년(선조 5) 선조의 첫째 아들 임해군(臨海君)을 낳았고, 1575년(선조 8) 광해군을 낳았다. 그러나 공빈 김씨는 두 아들의 생장을 지켜보지 못하고, 1577년(선조 10)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광해군이 겨우 3세였을 때였다. 공빈 김씨는 이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안장되었고 바로 남양주 성묘(成墓)이다.

공빈 김씨의 사후 광해군은 주로 인빈 김씨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인빈 김씨는 공빈 김씨 사후 선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후궁이었다. 인빈 김씨의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한우(金漢佑)[?~1574]이다. 인빈과 공빈은 다른 가문이나 둘은 인척 관계였다. 인빈 김씨의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사촌 자매가 공빈의 아버지 김희철의 사촌 김희일(金希逸)과 혼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인빈 김씨가 공빈 사후 임해군광해군을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은 후궁이 된 순서가 공빈 바로 다음인 탓도 있겠지만, 이러한 인척 관계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빈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광해군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급히 세자로 책봉되었다. 17년 가까이 세자로 있던 광해군은 1608년(선조 41) 2월 2일 정릉동 행궁[현 덕수궁]의 서청(西廳)에서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총애를 많이 받아 무려 9명의 왕자와 옹주를 낳았다. 맏이였던 첫째 아들 의안군(義安君)은 혼인 전에 사망하였고, 둘째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신립(申砬)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와 혼인하였지만 또한 일찍 사망하였다. 훗날 원종으로 추숭되는 셋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은 구사맹(具思孟)의 딸 능성 구씨(綾城 具氏)와 혼인하여 능양군(綾陽君) 등을 낳았다. 능양군은 조선의 제16대 인조(仁祖)가 된다. 넷째 아들은 의창군(義昌君)이었다. 이렇게 인빈이 낳은 아들 4명 중에서 신성군과 정원군은 특히 서인계의 저명한 무반(武班) 가문의 사위가 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인빈이 낳은 5명의 옹주 중에서 막내 정휘옹주(貞徽翁主)를 제외한 4명의 옹주가 모두 서인계 가문으로 하가(下嫁)하였다. 정휘옹주의 배우자는 선조 재위 후반 소북의 영수이었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손자 유정량(柳廷亮)이었다. 첫째 딸 정신옹주의 배우자는 서성(徐渻)의 아들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둘째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배우자는 윤방(尹昉)의 아들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셋째 딸 정숙옹주(靜淑翁主)의 배우자는 신흠(申欽)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넷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의 배우자는 박동량(朴東亮)의 아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이다. 4명의 부마들이 모두 대표적인 서인계 가문의 자손이었다. 광해군임해군 형제는 동인계 가문의 사위가 되었지만, 인빈 김씨의 자녀는 서인계 가문의 며느리와 사위가 되어 당색(黨色)이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선조가 자신의 자녀를 각기 당색이 상이한 가문과 혼인시켰던 것은 왕 주도의 정국을 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시기별 정국 동향과 면밀하게 살펴야 하겠지만 자녀 친어머니의 정치적 성향과 당대의 정국 동향을 비교하여 보면 더욱 자명하다.

광해군은 서인과 친밀한 성향을 지녔던 인빈 김씨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 즉위 직후 서인계는 정국의 주류를 점할 수 있었다. 광해군 대를 통틀어 대북(大北) 정국 주도가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계축옥사[1613] 이전까지는 이항복(李恒福)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이 대북에 못지않은 힘을 가졌다. 한편, 당시 대북 세력의 핵심은 광해군의 친인척이었다. 이른바 ‘삼창(三昌)’이라고 불렸던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 이이첨(李爾瞻)이다. 이 가운데 유희분과 박승종은 소북(小北) 계열이긴 하였지만, 대북과의 관계도 상당히 긴밀하였다. 유희분은 광해군의 부인 문화 유씨(文化 柳氏)의 오빠였고, 박승종은 광해군의 세자빈 밀양 박씨(密陽 朴氏)의 할아버지였으며, 이이첨은 세자빈의 외할아버지였다. 광해군은 오래 세자 생활을 하였지만, 명(明)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친형 임해군이 있었고, 왕비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즉위 명분에 흠이 있던 광해군광해군을 위시한 대북 세력은 광해군의 즉위 명분에 방해가 되는 임해군과 영창대군 등 광해군의 지위를 위협할 만한 왕자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나가는 정국을 추진하여 갔다. 가장 먼저 벌어진 사건은 바로 ‘임해군 옥사’이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역모를 꾸며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도에서 제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4월 29일이었다.

[인빈의 죽음, 정치적 파란의 시작을 알리다]

임해군을 제거한 광해군과 대북 일파는 선조의 적통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제거하는 모의를 시작하였다. 첫째는 바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는 것이었다. 1613년(광해군 5) 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자(庶子)들이 여주(驪州) 강변에서 모여 신세를 한탄하면서 노략질을 하다가 붙잡혔는데,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허위 진술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계축옥사’가 일어났고 김제남과 아들들은 사사되었다.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진 뒤, 1614년(광해군 6) 2월 10일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으니 겨우 9세였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임해군과 영창대군 등 재위에 위협이 되는 왕자들이 제거되는 등 정국은 몹시 불안하였지만, 인빈 김씨 소생의 왕자들에게는 별다른 정치적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1613년(광해군 5) 10월 29일 인빈 김씨가 59세로 사망하자 인빈 김씨 소생의 왕자와 손자들에게도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인빈 김씨는 12월 양주 풍양리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되었는데 현재의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는 남양주 순강원(順康園)이다. 인빈 소생의 왕자 중 첫째 의안군과 신성군은 선조 재위 연간에 사망하여 광해군 재위 당시 생존하고 있는 왕자는 정원군(定遠君)과 의창군(義昌君)이었다. 두 왕자는 임해군이나 영창대군처럼 직접적으로 목숨을 위협받진 않았지만, 정원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능창군(綾昌君)은 피해가지 못하였다. 능창군은 ‘신경희 옥사’에 연루되어 1615년(광해군 7)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신경희는 정원군의 친형 신성군의 처부이었던 신립(申砬)의 조카였는데, 양시우(楊時遇) 등과 능창군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장살되었다. 이후 능창군의 형 능양군[인조]과 능원군은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였고, 능양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조선 제1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인목대비의 유폐, 공빈의 왕후 추존]

영창대군과 김제남을 제거하기 시작한 광해군은 공빈 김씨를 왕후(王后)로 추존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공빈에게는 ‘공성왕후(恭聖王后)’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박홍구(朴弘耈)가 공성왕후의 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공성왕후의 추존은 1615년(광해군 7) 6월 사은사 윤방(尹昉) 등이 공성왕후의 책봉 고명을 받아서 돌아옴으로써 일단락되었다. 8월 광해군은 공빈의 신주를 ‘공성왕후’로 고쳐 썼고, 9월 종묘에 부묘하여 공빈을 선조의 정식 왕비로 추존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공성왕후부묘도감의궤』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도 광해군은 지속적으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성왕후의 면복을 주청하면서 많은 양의 은(銀)을 명나라 예부에 뇌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8월 광해군은 직접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공성왕후의 관복을 맞이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이 왕후로 추존되고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자 공빈의 묘 또한 왕릉으로 격상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공빈 김씨의 묘는 ‘성릉(成陵)’으로 격상되어 석물(石物) 또한 왕릉과 격식을 같게 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공빈의 신주는 종묘에서 내쳐졌고 성릉 또한 남양주 성묘로 격하되었다.

광해군이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는 동안 당시 선조의 후비로 대비(大妃)의 자리에 있던 인목왕후의 처지는 반대였다. 인목왕후는 1614년(광해군 6) 아들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뒤 대비 대우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지위까지 박탈당하고 서궁[현 덕수궁]에 유폐되기에 이른다. 엄연히 선조의 왕비로서 광해군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자 왕실의 대비로서 가장 존장(尊長)이었지만 광해군과 대북 일파는 ‘폐모(廢母)’를 추진하였다. 성리학적 윤리 질서가 자리 잡혔던 조선 왕조에서는 패륜(悖倫)과 같은 행위였다. 결국 광해군과 대북 일파는 1618년(광해군 10)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폐모를 추진하고 정청까지 열었다. 결과적으로 서인계가 주도하고 남인계가 동조하는 반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는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를 높였고, 교서를 통하여 권서국사의 지위에 올랐다가 2년 뒤 주청을 통하여 명나라로부터 공식 책봉을 받는다.

[죽어서 어머니들 곁에 묻히다]

광해군은 1623년 3월 14일 폐위되어 ‘군(君)’으로 강등되었고, 3월 23일 세자 내외와 함께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5월 22일 아들 내외가 유배지를 탈출하다 잡힌 뒤 며느리 박씨는 자결하였고, 아들은 6월 25일 사망하였으며, 광해군의 부인 유씨 또한 10월 8일 사망하였다. 홀로 남은 광해군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 옆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인 1637년(인조 15)경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1641년(인조 19) 7월 1일 유배지 제주에서 사망하였고, 이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와 가까운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안장되었다. 광해군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서 낳아 준 어머니, 길러 준 어머니와 함께 잠들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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