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큰 별, 이석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004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55년 12월 3일 - 이석영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5년 - 이석영 이유원(李裕元)에게 양자 입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5년 - 이석영 과거 급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12월 30일 - 이석영 중국으로 망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2월 - 이석영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도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4월 - 이석영 경학사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6월 - 이석영 신흥강습소 개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 이석영 신흥무관학교 출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 이석영 베이징으로 이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4년 2월 28일 - 이석영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년 - 이석영 대통령표창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 이석영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0년 8월 - 이석영 ‘이 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 이석영 경기도 남양주시 ‘이석영광장’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 이석영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 개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 이석영 ‘이회영기념관’ 개관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

[개설]

이석영(李石榮)백사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후손으로 명망가의 자손이었다. 하지만 이석영은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여섯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국망 이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한인 자치 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0년대 이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곤궁한 삶을 살았고, 1934년 상하이에서 순국하였다. 광복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한국 근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계]

이석영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수석(漱石)이며, 이명으로 이영(李永)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55년 12월 3일 아버지 이유승(李裕承)[1835~?]과 어머니 동래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명신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이석영의 가문은 이항복 이후 300여 년 동안 8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삼한갑족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 할아버지 이계조(李啓朝)[1793~1856]는 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우찬성·궁내부특진관 등을 거쳤다. 이석영은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서 이건영(李健榮), 이철영(李哲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호영(李頀榮) 등 총 6형제이다. 이석영 6형제는 사회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중국 서간도에 경학사와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한 주역들이다.

6형제의 맏이인 이건영은 조선 왕조의 관직을 하다가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1926년 국내로 돌아와 선산을 돌보다가 1940년 사망했다. 정부는 이건영의 공훈을 기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셋째 이철영은 서간도 망명 이후 신흥강습소 교장,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빈곤과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1925년 사망했다. 정부는 이철영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넷째 이회영은 탁지부 주사, 상동청년학원 원감 등을 역임하고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참여하였으며, 서간도 망명 이후 상하이로 옮겨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초대 의원이 되었다. 1924년에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에 참여하였고, 1931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였다. 1932년 일제의 고문 끝에 중국 다롄[大連]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이회영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시영은 대한제국 외부(外部) 교섭국장으로 일하다가 1910년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결성에 백범 김구와 함께하는가 하면 광복 이후 환국하여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1949년에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고, 1953년에 사망하였다.

이호영은 서간도로 망명하여 1918년 신흥강습소의 재무 담당을 맡았고, 1925년에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에 참여하였다. 1925년에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다물단(多勿團)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31년 베이징[北京]에서 가족과 함께 실종되었다. 정부는 이호영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석영은 1885년 31세 되던 해에 4종숙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에게 입양되었고, 후일 양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유원은 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 가오실(嘉吾室)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정치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는 위치에서 개항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군에서 서울까지 80리 길을 거치는 동안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해지며, 전답이 1만여 석(石)에 달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석영의 장남인 이규준(李圭俊)[1899~1927]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집 관계로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다물단의 단원으로 밀정 처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정부는 이규준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석영의 직계 후손인 이규준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그간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2022년 국가보훈처는 세 딸의 자녀 중 10명이 생존해 있다고 발표하였다.

[성장과 관직 생활]

이석영은 1855년 12월 3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苧洞)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부분의 명문가 자제들처럼 한문을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을 거쳐 188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석영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도 황제의 부름이 있었지만 출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석영이 벼슬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는 형제들 중 넷째인 이회영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 우당 이회영은 관직 생활이 시국을 바로잡고 나라의 명운을 개척하기 위함이지,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전히 개화와 수구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비판하며 서양 문물의 수용과 사회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회영은 이 같은 뜻을 이석영의 집인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홍엽정(紅葉亭)에서 주변 동지들과 형제들에게 설파하곤 하였다. 홍엽정은 본디 백사 이항복의 집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가 이유원이 사들여 별장으로 이용하였던 곳이었다. 1888년 이유원이 세상을 뜬 뒤에는 이석영의 활동 공간이 되었다. 이회영은 1898년 홍엽정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제왕의 시대는 가고 사민 자유평등의 시대가 왔다, 우리의 전통과 습성을 생각하면서도 시대의 변천을 따라 새 나라를 건설할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대한제국의 정책 방향과 차이가 있었던 이러한 개혁적 지향은 이석영을 비롯한 형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서간도 망명 계획의 수립]

이석영은 시대를 보는 눈, 담대한 행동력 등에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동생이었지만 이회영을 깊이 신뢰하였다. 이석영의 6형제가 언제 서간도로 망명 계획을 확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재산의 처분을 비롯해 집단 이주 장소의 물색 등 비밀리에 진행된 모든 일들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을사조약 체결 이후 고국을 떠날 생각이 처음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등으로 이어지는 일제 침략의 본격화는 그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공유한 이회영과 이석영 형제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이회영은 1906년 봄 해외로 떠나는 이상설과 북간도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는 일에 대해서 논의한 바 있다. 이 무렵부터 독립군 기지 구상이 형체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또한 이회영은 1907년 신민회 창립 당시 이러한 계획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이상설을 찾아가 비밀 단체 조직, 군대 결성, 운동 자금의 준비, 지사들의 규합과 국민 교육 등의 실천 방침을 논의한 다음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회영의 계획은 신민회가 1910년 3월 긴급 간부 회의를 열고,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한 다음 독립군 기지 건설 전략을 확립한 것에 비해 상당히 일찍 수립된 것이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국망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회영과 이석영은 강점 이후 독립군 기지 건설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일 이회영과 이석영 사이에 끈끈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면, 불과 몇 달 사이에 어떻게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6형제와 가문 전체가 망명의 길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이회영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 답사에 나섰으며, 이동녕, 장유순, 이관식 등이 함께했다. 그리고 이석영의 6형제는 이회영이 한 달 여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1910년 9월, 망명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석영은 수천 석의 재산과 토지를 모두 팔고, 형제들도 재산을 처분하였다. 6형제의 일가권속(一家眷屬) 60여 명이 모두 예닐곱 무리로 나눠 따로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이들은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넜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목적지인 중국 봉천성(奉天省)[현 중국 지린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도착하였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

1911년 4월 이석영 일가와 독립운동가들이 서간도 땅에 자리 잡은 이후,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노천 대회가 열렸다. 이 노천 대회를 통해 조직된 단체가 바로 경학사이다. 농사하고 공부하자는 단순한 뜻이 담긴 경학사는 경제 생활과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동량이 되겠다는 의지를 안고 결성되었다. 경학사는 서간도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단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흥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망명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인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대규모의 한인들이 몰려들자, 중국인들은 한인들을 자신의 땅을 빼앗으러 온 사람들 혹은 일본의 밀정으로 간주하였다. 다행히 이와 같은 갈등은 이석영 일가와 당시 중국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인연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 당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주둔했을 때 위안스카이의 상관인 리훙장(李鴻章)이 이석영의 아버지 이유승, 양아버지 이유원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회영이 위안스카이를 면담한 뒤, 위안스카이는 동삼성(東三省)[중국의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黑龍江省)] 총독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한인들의 토지 구입과 중국 국적 취득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신흥학교는 1911년 6월 추가가 마을의 옥수수 창고에서 개교식을 가졌고, 중국 당국과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흥강습소’라고 이름을 붙였다. 교육 기관으로서 번듯한 교사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중국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로 장소도 옮긴 1912년 7월이었다. 학교를 설립하는 비용은 대부분 이석영으로부터 나왔고, 수많은 동포와 학생들이 직접 자신의 힘을 보탰다. 그리고 이석영은 주변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어 신흥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신흥학교는 1919년에 중국 봉천성 유하현 고산자가로 이전하면서 독립 투사 양성에 더욱 초점을 맞춘 신흥무관학교로 재출범하였다.

이처럼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데에는 이석영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이석영은 동생 이회영의 후원자를 자임하며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들 앞에 나서길 썩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920년대 이후 눈에 띄는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이회영이 1919년 이후 활동 무대를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이석영도 함께 베이징으로 떠났다. 이미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도 이석영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잊힌 죽음, 추모 활동의 시작]

이석영의 이름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신문에 실린 부고를 통해서였다. 『동아일보』 1934년 2월 28일자는 “만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석영이 금일[2월 16일] 오후 2시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사망했다.”라고 보도하였다. 다음날에는 “이석영의 장례식이 2월 20일 상하이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상하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석영은 베이징에 체류하던 시기부터 가난을 피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 전선에 모든 재산을 내놓았고, 가족들은 죽고 흩어졌다. 이석영은 빈민굴에서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석영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20년 8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경기도 남양주시는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2021년 설치된 이석영광장에는 중앙의 표지석과 표지석을 둘러싼 여섯 개의 돌이 있는데 6형제가 전 재산을 바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여섯 개의 돌은 이석영이 살았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석영광장 지하에는 ‘Remember(리멤버) 1910 역사 체험관’이 설치되었다. 2021년에는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건물 1층 로비에 이석영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와 함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에는 2021년 ‘이회영기념관’이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이회영과 형제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어, 이석영에 대한 기념 공간으로도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독립운동 전선에서 재정적 후원의 문제는 그동안 심도 깊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표면에 나서 활동했던 투사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이다. 이석영은 만주의 독립운동이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독립운동가였다.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가시밭길에 나선 이석영의 삶이 한국 독립운동의 의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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